장기이식 법률 보완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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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5면

무역업을 하는 李모씨에겐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이명환이다. 밝을 명(明)과 밝은 환(煥)을 따서 만든 이름이다. 그에게 새로운 삶을 허락한 무명의 기증자를 기리기 위해서다. 1999년 오토바이 사고로 뇌사에 빠진 남성이란 것만 알 뿐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20년 가까이 당뇨를 앓아온 탓에 눈의 망막과 심장, 콩팥에 치명적 손상이 나타난 것은 98년이었다. 골프장에서 갑자기 쓰러진 그에게 내려진 진단명은 당뇨 합병증으로 인한 신부전증.

콩팥이 망가져 당장 피를 걸러주는 투석을 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일주일에 세 차례, 한번에 4시간씩 받는 투석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한 사투였다. 물을 마시고 싶었지만 많이 마시면 몸이 붓고 아파, 하루 한두컵 이내로 줄여야 했다.

그런 그에게 한 뇌사자가 콩팥과 췌장을 기증하게 됐다. 99년 겨울 서울아산병원 일반외과 한덕종 교수로부터 콩팥과 췌장을 동시에 이식받은 그는 3년이 지난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물도 마음놓고 마시고 단음식도 마음놓고 먹을 수 있다. 모두가 기증자 덕분이다.

그러나 기적과도 같은 행운은 李씨를 끝으로 재연(再演)되지 않고 있다. 李씨가 장기(臟器)기증 수술을 받은 직후 장기 이식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국가가 기증된 장기의 분배를 모두 관장하게 됐기 때문이다.

과거엔 뇌사자 가족들을 설득해 기증받은 장기는 해당 병원의 환자에게 이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국가에서 만든 장기이식센터에 넘겨지므로 기증을 받아낸 병원이 활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병원으로선 열심히 장기 기증을 설득할 동기를 잃은 셈이다.

수술기법 등 의학기술은 과거보다 발전했으나 장기 기증자가 없어 환자들이 애태우고 있다. 올해 서울아산병원에서 췌장 이식수술을 받은 사람은 아직 한 명도 없다. 지금도 수천명의 난치병 환자들이 장기를 기다리다 숨지고 있다.

공공성이 강한 의료에 대해 국가의 적절한 관여는 필요하다. 그러나 원칙을 내세워 지나치게 자율을 억압하는 것은 부작용을 낳는다. 공정한 장기의 분배는 중요하다.

그러나 분배할 장기도 없는 상황에서 공정한 분배란 공염불이다. 난치병 환자의 생명보다 절실한 것은 없다. 지금이라도 장기 이식을 독려할 수 있도록 법률적 보완이 필요하다.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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