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가 있는 이야기 마을] 짠돌이 남편과 비상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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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다 썼나." "뭐, 공과금 내고 아이들 간식비하고 국거리랑 찬거리 조금 샀더니만 바닥이네."

"아이고, 만날 밑 빠진 독에 물붓기다." 남편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만 지갑을 털어 2만원을 손에 쥐여 준다.

"아껴 쓰자. 참, 오늘부터 가계부 좀 쓰고 내게 확인 받지."

"알았어요."

자영업자인 남편은 늘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사람처럼 대중없이 생활비를 준다. 요즘처럼 경기가 나쁘면 아무리 쥐어짜도 돈 구경하기 어렵다. 남편의 짜증은 갈수록 늘고 손끝은 매워진다. 그럴수록 가계를 꾸리기가 더욱 힘들어진다. 그런데도 남편 몰래 비상금을 챙기고 산 지가 벌써 10년이 됐다. 남편은 시아버지가 보험을 들고도 한푼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게 한이 돼 보험이란 말만 들어도 히스테리 반응을 보인다.

그래서 결국 내가 나섰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생활비를 쪼개 두 아이의 교육보험을 납입하기 시작했다. 혼자서 매달 10여만원을 메우느라 끙끙 앓기 얼마였던가. 연체를 거듭하고 이리저리 메우는 게 퍼즐 맞추기보다 힘겨웠다. 남편의 사업이 어려워져 생활비가 변변찮을 때는 시간제 아르바이트도 했다. 주소도 친정집으로 하고 보험증권도 친정집에 맡겨 놓았다. 그래서 돈 많이 쓴다는 남편의 타박도 내심 웃으며 넘길 수 있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했던가. 교육보험 만기가 눈앞에 왔다. 이것이 끝나면 남편과 내 건강보험을 들까 궁리하는 것도 행복하기만 했다. 그런데 생활비 많이 쓴다고 언짢게 나간 남편이 저녁에 들어와 가슴 철렁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이제 나도 나이가 들었는데, 무슨 병이라도 생기면 벌어 놓은 돈도 없어 어쩔 건데. 그러니 어디 잘 알아보고 내 건강보험 싸고 좋은 걸로 하나 들지."

아니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생전 않던 소릴 다 하고. 혹시 내 비상금을 알고 이러는 거 아냐. 아마 나를 시험하는 건지도 몰라. 절대로 넘어가면 안돼.

이미애(43.주부.부산시 대연4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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