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대한 자연의 대서사시 구로사와 감독 '데르수 우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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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싹 마른 낙엽 더미에 첫 눈이 내려앉기 전, 홀로 배낭을 메고 깊은 숲으로 들어간다. "산과 숲은 가끔 활기차고 호의적으로 보인다. 물론 고요하고 음침할 때도 있다"는 시정(詩情)에 빠졌다가, 모닥불을 벗삼아 잠을 청할 때면 "이 계곡은 마녀들의 연회장 같다. 빗자루를 탄 모습까지 상상된다"고 일기에 적게 된다.

그 때 작은 키의 다부진 노인이 나타난다. 어린 아내와 아들과 딸을 천연두로 잃고 수많은 여름을 숲에서 보낸, 자신의 나이조차 모르는 골디인 사냥꾼. 그는 발자국만 보고도 "2∼3일 전 중국 노인이 지나갔다"고 설명하며, 해와 달과 물과 바람을 고맙지만 무서운 사람으로 여기며, 호랑이를 보면 "군인들이 총을 쏠지 모르니 빨리 도망가라"고 이른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데르수 우잘라(Dersu Uzala)'(15세)는 자연의 영화다. 자연과 함께 살아온, 아니 그 자신이 자연인 늙은 사냥꾼 데르수 우잘라(막심 문주크). 도시에서 온 측량 군인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유리 솔로민). 두 주인공이 생사를 함께 하며 여행하는 우수리 지방의 자연 풍광과 날씨 또한 주인공이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위로 휘몰아치는 매서운 바람, 끝이 안보이는 평원을 시뻘겋게 물들이는 석양, 우르릉거리며 녹아내리는 얼음 계곡. 장면들은 "인간은 자신이 자연의 일부란 사실을 잊고 자연을 파괴한다"는 감독의 연출 변을 웅변한다. 이처럼 광대한 자연 속을 헤매는 인간의 걸음, 영화의 속도는 느리다.

'일본 영화계의 천황'으로 일컬어지는 구로사와 감독이 1975년 만든 '데르수 우잘라'는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극동 전문가이며 민족주의자인 블라디미르 아르세니예프(1872∼1930)가 23년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 젊은 시절, 작가의 자전적 소설을 읽고 감동받은 구로사와는 39년에 촬영을 시작하나, 원작의 배경인 러시아에서 찍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단했다고 한다.

결국 그는 74년에 소련 모스 필름의 제작 지원을 받아 원작자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 아르세니예프 마을을 중심으로 9개월에 걸쳐 사계절을 담았다. 그리고 제9회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대상을,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데르수 우잘라' DVD는 석 장의 디스크로 이루어져 있다. 자연의 소리와 풍광을 실감나게 느끼고 싶다면 아나모픽 와이드스크린에 돌비 디지털 5.1 사운드로 감상할 것을 권한다. 영화의 배경인 1902∼10년에 다가가고 싶다면 레터박스에 돌비 디지털 모노 사운드로 감상하는 것이 좋겠다.

서플먼트로는 원작자와 영화 스태프·배우들에 대한 영문 글 자료, 촬영 현장과 모스크바 영화제 수상 장면을 담은 흑백 기록 필름, 유리 솔로민이 회상하는 감독과 촬영 에피소드, 포토 갤러리가 있다.

DVD 칼럼니스트

oksunny@ymc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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