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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세대의 발랄한 엽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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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나이·이름은 물론 심지어 성별조차 베일에 싸인 '듀나'라는 이름의, 그러나 이미 소설집을 세권이나 출간한 소설가의 신작 소설집을 읽으려면 전시대의 문학에 대한 기대치를 일찌감치 접을 필요가 있다. 소재와 분위기 모두에서 근대소설의 분위기는 찾아 볼 수 없다. 12편 단편소설이 담긴 소설집의 첫번째 작품 '태평양 횡단 특급'부터 심상치 않다.

비행기가 없어 철도가 세계를 잇는 가장 유력한 교통수단인 연대 미상의 시대. 전지구적인 교통 독점권을 행사하는 '국제철도회사'의 영향력은 웬만한 국가의 주권은 우습게 보는 가공할 만한 것이다. 2백56만6천7백64개의 교각을 태평양에 세워 호주와 남미를 잇는 철도 노선을 개통한 이 회사의 소유주인 여주인공은 흔들리는 철도 위에서 안정감을 느끼는 비정상적인 인물로 묘사된다.

작가가 1994년부터 PC 통신 상에서 연재해 인기를 끌었다는 점, 작품들이 SF 소설 같은 환상적인 내용을 다룬다는 점 등은 그의 작품 세계가 90년대 이후 신세대 작가로 분류돼온 김영하·백민석·배수아 등의 감수성과 비교해 어떤 좌표를 차지할 수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에서 자살을 도와주는 전문가를 다룬 김영하나, 『장원의 심부름꾼』에서 유령을 다룬 백민석은 이미 제도권 문학의 적자(嫡子)로 자리잡았다.

반면 김영하나 백민석의 세계에서 현실 너머 환상으로 한 발 더 내디딘 듀나는 참신한 소설 형식에 걸맞은 문학적 성취도 갖추고 있는지 검증받아야 할 처지다.

이 대목에 대한 판단은 평단의 몫이고 그 결과에 따라 그의 PC 통신 문학·SF 문학의 제도권 진입 여부가 결정될 것이겠지만, 듀나의 세계는 일단 괄목할 만하다. 갈수록 다이내믹하게 전개된다는 점도 주목거리다.

'대리 살인자'는 익명성과 일회성, 무책임성을 특징으로 하는 PC 통신 채팅방의 잡담·한담에서 비롯된 살인을 다루고 있다. 네명의 대화방 참가자 중 세사람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 사람을 돌아가며 밝혔고, 죽일 때 사용하고 싶은 방법도 '잔인하게' 짜냈다. 듣고 있던 재칼이라는, 킬러임이 분명한 문제의 인물은 한달 간격으로 채팅 잡담 속의 살인을 실행한다.

'첼로'는 인간적 감성과 지성을 갖춘 것은 물론 섹스도 가능한 진짜 사람 같은 인조인간과 중년 여성의 동성애를 다뤘다. 주인공은 인조인간의 가슴에 코를 묻고 인공심장이 찰칵거리는 소리를 듣는 기형적인 오르가슴을 잊지 못해 인간적 자존심을 팽개치고 스스로 차버렸던 인조인간을 다시 찾는다.

빠른 템포의 기악곡을 뜻하는 페르페튬 모빌레의 번역어를 제목으로 삼은 '무궁동(無窮動)'은 서로에 대해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모녀가 번갈아 가며 체세포를 복제한 클론을 딸로 삼는다는 엽기 내용을 담고 있다.

신간의 문학적 상상력은 자명하다. 컴퓨터 채팅·게임에서 시작해 복제인간, 증오와 원망이 탄생시킨 허깨비들을 사냥하는 상상적인 상황들이 단골처럼 등장하는가 하면 세상은 인간의 힘을 능가하는 기계가 접수한 경우이기 일쑤다. 즉 SF적이고 팬터지적이다.

그러나 소설들의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 않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나 조지 오웰의 『1984년』과는 정반대다.

'첼로'의 주인공의 마지막 선택은 로봇과의 사랑에 대한 긍정일 것이다.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기계들의 업적을 찬양한다. '꼭두각시들'의 주인공들은 전체주의적인 감시 시스템을 거부감 없이 수락한다. 마지막 작품인 '미치광이 하늘'에서 작가는 자신의 문학관의 한계와 가능성을 슬쩍 드러내려고 마음 먹은 것 같다.

우리 시대는 구세계가 남긴 재료들을 이리저리 변형만 했지 전적으로 새로운 어떤 것을 아직 창조하지 못했다. 구세계의 예술이 구체적인 세계와의 대화였다면 신세계의 예술은 독백같은 특징을 갖는다. 하지만 좋은 예술가는 언제나 소수라는 진실은 신세계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작가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진다. 작가는 자신의 신상 정보를 철저히 비밀에 붙이고 있다. 출판사조차 작가가 서울에 사는 30대 초반의 여성일 걸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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