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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權·봉사 앞장선 '미국의 양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결정된 지미 카터는 퇴임 후의 행적이 더욱 아름다운 대통령으로 꼽힌다. 크고 작은 분쟁이 단 하루도 끊이지 않고 있는 지구촌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현직 대통령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국제분쟁의 해결사로 큰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사례가 1993∼94년 한반도 핵위기다.

핵개발 의혹으로 국제적 압력을 받던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라는 초강수로 맞섰다.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북한 영변 핵시설 공습을 적극 검토했다. 한반도에는 그 어느 때보다 전운이 짙게 감돌았다.

이때 평화의 메신저로 나선 사람이 카터였다. 94년 6월 판문점을 거쳐 평양에 들어간 그는 김일성(金日成)주석과의 담판으로 일촉즉발의 위기를 해결했다. 핵개발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는 데 합의한 것이다. 현재 북·미관계 기본 틀인 제네바 합의문도 김일성-카터 회담에 그 뿌리를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카터는 그밖에도 보스니아 분쟁의 해결을 위해 노력했고 99년엔 우간다와 수단의 평화협정을 중재했다. 모잠비크와 동티모르 등지에선 선거감시 활동을 벌였다. 지난 5월엔 미국의 적성국인 쿠바를 방문,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장과 회담하고 관계 개선을 역설하기도 했다.

카터는 9·11 테러를 당한 미국에서 애국주의 물결이 거셀 때도 "미국의 고립주의와 나라 간 빈부 격차가 제3세계 사람들의 미국에 대한 증오심을 키우고 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그런 지론을 가진 카터가 최근 이라크 공격 반대 운동의 선봉에 서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라크에 대한 무력 사용 결의안이 하원을 통과한 다음날 반전론자인 카터가 평화상 수상자로 발표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평화상 후보 중의 한사람으로 올라 있었던 것이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의 군나르 베르제 위원장은 수상자 발표 직후 "부시 행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말했다.

땅콩 농장주 출신인 인간 카터의 진면목은 퇴임 후 혼신의 힘을 쏟고 있는 인도주의 활동과 봉사 활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랑의 집짓기'(해비탯)운동에 뛰어든 카터가 '목수'로 변신해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에선 조금도 피로한 기색을 찾아볼 수 없다. 고향 조지아주 침례교회에선 손자뻘 어린이들을 손수 가르치는 주일학교 교사이기도 하다.

카터는 벌써 오래 전에 노벨상을 받았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평화협상의 초석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이끌어 냈기 때문이다. 협정 당사자인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와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은 78년 나란히 노벨상을 받았다.

하지만 미국 국내에서 카터 재임시절(1977∼81)의 치적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높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란 주재 미국 대사관 직원들의 인질 사건에서 그는 결단력이 부족한 우유부단한 대통령으로 비춰졌고 유가 폭등과 인플레이션을 잡는 데도 실패했다. 불황에 지친 미국 유권자들은 80년 재선에 나선 카터에게 매우 냉담했고 결국 그는 자신의 땅콩 농장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56세의 나이에 시작한 '제2의 인생'은 화려했다. 퇴임 후 카터재단을 설립하고 분쟁해결과 인권운동·봉사활동에 투신해 온 그는 '마틴 루터 킹 상'을 비롯한 각종 인권상을 받았고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 그 대미를 장식했다. 99년 펴낸 저서 『나이드는 것의 미덕』에서 말한 것처럼 "인생이란 점점 확대되는 것이지 축소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카터는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예영준 기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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