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41>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45. 가수출신 국회의원 1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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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1995년 여름 나는 정치에 발을 들여놓기로 마음을 굳혔다. 정치 입문은 전혀 준비된 일이 아니었다. 가수에서 정치인으로. 그 변신의 과정에 극적인 뭔가가 있으려니 하는 사람이 많은데, 솔직히 오래 계획하고 실행한 일이 아니다. 신분 상승의 기회를 잡겠다는 속물스런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해 7∼8월께 새정치국민회의의 창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정치 인생이 시작됐다. 아내와 함께 심사숙고한 것외에 그 누구와도 이 문제를 상의하지 않았다. 발기인 접수 마감을 며칠 앞두고 사무실에 전화를 걸어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변신의 변이랄까, 정치에 참여한 이유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를 통한 정권의 교체를 이루는 밀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평소 국민의 선택에 의한 정권의 교체야 말로 민주주의의 완결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제 때가 왔다는 나름대로의 판단이 섰던 것이다.

나는 정치를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저항감 같은 게 있다고 여긴다. 나도 변신 순간은 그랬다. 결심이 선 이상 미력하나마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는 데 일조하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는 야당에 참여하는 게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나는 경기도 평촌에 살고 있었다. 이곳은 안양 동안을구 선거구에 속해 있었다. 나는 11월 안양 동안갑구 지구당 조직책으로 임명되면서 지역구인 관양동으로 이사를 했다. 이어 12월 22일 창당대회를 열고 위원장으로 선출됐다.

이런 갑작스런 변신 과정에서 가요계 선후배와 동료들의 응원이 큰 도움이 됐다. 그들은 대중가요계에서도 한사람쯤은 정치에 참여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겠냐는 바람같은 것을 털어놓았다. 초반 결심이 굳지 못했을 때 이를 더욱 견고하게 해주는 힘이 됐다. 그래서 나는 "지역구가 둘이다. 하나는 동안갑구요,하나는 가요계다"라고 기탄없이 얘기하곤 했다.

나는 본업인 가수의 신분으로 돌아온 지금도 전문분야의 대표성 있는 사람들이 국정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하고 바람직하다고 여긴다. 그래야 각계가 고루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결과적으로 정치인으로서 그것을 얼마나 실천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당당히 말할 수는 없다. 열심히 노력했다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

지구당 위원장에 선출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됐다. 당초 회의적이었던 아내도 내 편이 돼 열심히 독려했다. 안양 지역에서는 이인제씨 외에 정치 초년생이 당선된 적이 없었다는 주변의 '엄포'가 부담이었다. 연고도 없어 막막했다.

그런 적수공권의 상황에서 우선 동료 가수들이 돌파구를 열어주었다. 창당 대회에 이미자·패티 김·태진아·설운도 등 기라성 같은 가수들이 바쁜 일정을 제쳐두고 나와 유권자들에게 한표를 호소했다. 이들의 헌신은 후회 없는 내 가수 인생을 한마디로 정리해 주는 듯했다.

"미스터 최. 나 이런 행사장은 처음이야." 평소 나를 '미스터 최'라고 부르는 패티 김이 어려운 발걸음을 이 한마디로 설명했다. "친구 잘 둔 덕분이지." 나는 미안하다는 생각에 이런 식으로 응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자·김상희·인순이·조영남·설운도 등은 시장을 돌며 "우리 최위원장 국회의원 되게 해달라"며 간절하게 호소했다. 이들의 자발적인 참여 덕분에 나는 돈이 적게 든 선거를 치를 수 있었다. 처음 유권자들이 나에게 보내준 정치인으로서의 신뢰는 부족한 편이었다. 나는 특별한 공약을 내세우기보다는 "내가 살아왔던 것처럼 성실하며 정직하고, 깨끗하게 정치하겠다"며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진인사대천명이랄까. 결과는 좋았다. 5파전으로 치러진 선거에서 2위 후보와 2천표의 비교적 근소한 차이로 나는 승리를 했다. 제 15대 국회의원으로 당선한 것이다.

나는 '가수 출신 정치인 1호'라는 수식어를 달고 화려하게 여의도에 진출했다. 정치를 하겠다는 결심에서부터 당선까지 숨막힐 정도로 정신없이 보낸 시절이었지만 그 열매는 달았다. 국회의원은 반드시 특별한 사람이 하는 게 아니라 각 분야의 전문가라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 가장 기뻤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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