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탐구권영길]빨치산 아들… 과묵한 리더십 '인내 9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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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지난달 8일 민주노동당 대통령후보로 공식 선출됐으며, 7일 선대위를 출범시켜 본격적으로 선거운동에 들어간 권영길(權永吉)은 1941년 11월 5일 일본 야마구치(山口)현에서 태어났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출신인 부친 권우현은 36년 이웃마을 처녀 하영애와 고향에서 결혼한 직후 단신으로 일본에 건너갔고, 5년 뒤인 41년초 합류한 하영애와의 사이에서 권영길을 갖게 됐다.

권영길이 태어난 직후 야마구치현에서 도쿄로 옮겨 작업장 등에서 막노동 등을 하던 권우현은 일본이 항복한 45년 8월 15일 가족을 이끌고 부산행 배에 몸을 싣는다. 권영길은 일본에서의 유년기 시절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귀국한 권우현은 고향에 정착한다. 그는 구장(區長)을 맡으면서 마을의 대소사를 두루 챙겨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교육에 관심이 많아 야학을 여는 한편 마을 유지들을 설득해 입석초등학교를 세웠다. 권영길도 48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던 권우현은 6·25 발발 후 지리산으로 들어간다. 하영애는 "산사람들이 몰래 내려와 '함께 안가면 죽인다'고 해 남편이 고민이 많았다.부산으로 도망간 적도 있었지만 결국 입산하고 말았다"고 전했다.

글짓기·웅변에 소질

53년 휴전이 된 뒤 지리산 일대에서는 국군의 대대적인 빨치산 소탕작전이 전개됐다. 결국 권우현은 54년 12월 허기를 채우기 위해 친척집에 들렀다가 국군에게 들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이후 권영길의 어머니는 남편에 대해 일절 입을 열지 않았다. 권영길은 "아버지가 빨치산이었다는 것을 굳이 감추지 않겠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을 소중히 간직할 것"이라고 했다.

권영길은 작은 아버지 권태현을 따라 부산으로 가 51년 남부민초등학교 3학년으로 편입한다. 처음엔 적응을 못해 고생했으나 4학년이 되면서 차츰 두각을 나타냈다. 글짓기와 웅변에도 소질을 보였다.

55년 경남중에 입학한 권영길은 인기가 좋았다. 중·고·대학 동창인 홍상석(전 부산MBC 국장)은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 친구들이 몰려들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났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깃발이었다. 게다가 또래보다 키도 한 뼘 정도 크고 덩치도 좋아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전했다. 권영길은 3학년 때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2등에 머물러 부회장이 됐다. 그는 경남고에 진학한다.

고1 때 권영길은 친구들과 독서회를 조직한다. 경남고를 중심으로 한 부산고·경남여고·부산여고 등의 연합서클이었다. 고2 때는 성한표(전 한겨레신문 부사장) 등과 함께 '옥스퍼드'라는 일종의 친목 모임을 만든다.

이어 권영길은 옥스퍼드와 독서회 멤버 중 마음이 맞는 친구 7∼8명과 남부민동 근처 쓰레기 매립장에서 1백여 명의 부랑자들을 모아놓고 야학을 시작했다.

부잣집 외동딸과 熱愛

이 무렵부터 권영길은 장차 농민운동을 하기로 마음먹고 농대 진학을 결심한다. 권영길은 경남 김해 지역을 둘러본 뒤 대학노트 한 권 분량의 농촌실태 보고서를 작성, 독서회 회원 60여명을 상대로 발표회를 열기도 했다.

61년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에 입학한 권영길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맛보게 된다. 그가 꿈꾸던 농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해 가을엔 『귀향』이란 제목의 단편소설을 완성해 교내 문학작품 공모전에 출품, 가작으로 입선하기도 했다. 빨치산이었던 한 사내가 결국엔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이었다. 권영길은 그해 12월 군입대를 택했다.

권영길은 최전방 부대인 25사단에 배치된다. 1년6개월짜리 학보병이었다. 63년 6월 제대한 권영길은 바로 복학하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가 중·고생 그룹과외를 하며 등록금을 벌었다.

65년 3월 복학하러 상경한 권영길은 강지연(59)과 열애에 빠진다. 강지연은 이화여중·고를 나와 당시 이화여대 교육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강지연은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창업주인 강의수의 무남독녀였지만, 63년 1월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회사마저 넘어가면서 큰 시련에 봉착해 있었다.

강지연의 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했다. 가난한 집의 편모 슬하의 외아들이란 점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러나 두 사람은 68년 10월 15일 남산 드라마센터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낸 이호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후 권영길 부부는 두 홀어머니를 한집에 모시고 살았다.

자녀는 2남1녀. 큰딸 혜원(33)은 고려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남편과 함께 미국 코넬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큰아들 호근(32)은 한국외국어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한화에 근무하다 지난해 건축디자인을 공부하러 프랑스로 유학갔다.

69년 대학을 졸업한 권영길은 명동에 '아람죽집'이란 건강식품 판매점을 열었지만 실패했고, 71년 3월 공채로 서울신문에 들어간다. 입사 동기인 권오휴(AC닐슨 사장)는 "과묵하면서도 포용력과 리더십이 뛰어나 동기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권통'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했다. 권오휴는 또 "입사 때 외국어시험을 프랑스어로 보기에 물어보니 '파리특파원을 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 전했다.

신문사 휴직뒤 파리 유학

70년대 후반 유신체제가 최고조에 달할 무렵 권영길은 성한표 등 지인 5∼6명과 비밀 이념서클을 조직한다. 일주일에 한번씩 모여 이념서적을 읽으며 토론하는 모임이었다. "뭔가 실천에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도무지 돌파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심한 좌절감에 빠졌고, 새로운 모색을 위해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다."

권영길은 신문사를 휴직한 뒤 1979년 10·26이 터지기 한달 전 파리신문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듬해 서울신문 통신원이 된 권영길은 81년 4월 정식 특파원이 돼 이후 7년간 파리에 머물게 된다. 당시 특파원을 함께 했던 한 언론인은 "저녁이면 거의 매일 함께 술을 마셨지만 그가 노동운동에 뜻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그의 행보를 보고 깜짝 놀랐다"고 전했다.

88년 2월 특파원에서 돌아온 권영길은 두달 뒤 서울신문 노조가 설립되자 곧바로 노조에 가입해 부위원장을 맡았다가 위원장이 사임하면서 위원장 직무대행을 한다. 그리고 노조위원장 자격으로 전국언론사노동조합협의회(언노협)에 참여했고, 언론노련 초대 위원장이 된다.

권영길은 언론노련 위원장을 제의받고 무척 고민했다. 강지연은 "남편이 한참을 고민한 뒤 '더이상 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고 하더라. 그의 삶을 알기 때문에 차마 반대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90년 생산직 노조 중심의 전노협과 사무직 노조 중심의 업종회의 등으로 단위노조가 뭉칠 때 업종회의 의장을 맡은 권영길은 '민주노조 총단결'을 기치로 내걸고 두 조직의 통합작업에 적극 나선다. 하지만 개성이 강한 노조간부들을 한데 묶는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95년 7월 대전에서 열린 민주노총 준비 대표자회의에서 권영길은 인신공격성 비난까지 받게 된다.

당시 권영길과 함께 일했던 최철호(전교조 대외협력실장)는 "강성 노조들은 '민주노총으로 가는 건 노동운동의 퇴보이자 하향 평준화'라고 권영길을 맹비난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벽돌을 쌓듯 집권 노력"

당시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한 관계자는 "민주노총의 창립 시기에 강한 리더십으로 회의를 효율적으로 진행하지 못해 결국 밤을 꼬박 새워야 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다른 관계자는 "회의가 열리면 끝까지 들은 뒤 맨 마지막에 상황을 정리했다. '인내 9단'이란 별명이 붙었다"고 했다. 그는 95년 11월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에 선출된다.

권영길은 96년 연말 총파업 때 파업과 조업재개 등 강온 전술을 적절히 구사하며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느라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아픔을 겪기도 한다.

97년 민주노총은 총파업의 성과를 바탕으로 진보진영의 정치세력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 그해 10월 '국민승리21'을 결성했으며 권영길을 대선후보로 선출한다. 권영길은 15대 대선에서 30만여표(1.2%)를 얻었다.

그는 2000년 1월 민주노동당을 창당, 대표로 취임한 뒤 4·13 총선 때 경남 창원을에 출마했다가 5천여표 차로 고배를 마셨다. 민노당은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8.1%의 득표율(1백34만표)로 제3당으로 급부상했다.

권영길의 앞길엔 적지 않은 난관과 과제가 놓여 있다. 최근 권영길의 방송토론에 참가했던 한 패널리스트는 "당위성만 주장할 뿐 정책을 추진할 구체적 방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며 "아직도 운동과 정당활동을 혼동하고 있는 듯하다"고 지적했다.

권영길은 "세계 역사상 진보정당이 '우연히' 집권하는 일은 없다. 벽돌을 쌓듯 축적해나가 어느 날 집권에 성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2004년 원내 진출, 2008년 교섭단체 구성, 2012년 원내 제1당, 2016년 집권이 그의 목표다.그의 실험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지켜볼 일이다.

박신홍 기자

jbjean@joongang.co.kr

권영길 후보 신상명세

본적:경남 산청군 단성면 입석리 782

키:1백76㎝ 몸무게:76㎏

본관:안동(安東) 혈액형:B형

가족관계:모친 하영애씨, 부인 강지연씨와 2남1녀

재산:3억6천5백34만1천5백21원(모친 재산 포함)

납세:재산세 27만7천2백80원(2002년),토지세 26만1천5백90원(2001년)

별명:'아버지''똥구두''권통'

특기:수영 취미:독서·산책

종교:가톨릭(세례명 가롤로)

주량:두주불사지만 최근엔 절제 중

흡연량:거의 안피움

좌우명:자기 인생에 책임을 져라

감명깊게 읽은 책:홍명희의 『임꺽정』, 조정래의 『태백산맥』

감명깊게 본 영화:시네마 천국

좋아하는 배우:안성기·문성근

좋아하는 가수:윤도현·서태지

좋아하는 노래:고향의 봄·맨발의 청춘·봄날은 간다

좋아하는 음식:된장찌개·생선·젓갈

홈페이지:www.ghil.net

권영길 연표

1941년 11월 5일 일본 야마구치현에서 출생

45년 8월 귀국. 경남 산청군 단성면에 정착

48년 3월 입석초등학교 입학

55년 3월 부산 남부민초등학교 졸업

58년 2월 경남중 졸업

61년 2월 경남고 졸업

61년 3월 서울대 농대 잠사학과 입학

61년 12월 학보병 입대

63년 6월 육군 만기 제대(상병)

67년 12월 대한일보 입사

68년 10월 강지연씨와 결혼

69년 2월 서울대 졸업

71년 3월 서울신문 입사(공채 17기)

79년 9월 프랑스로 유학

81년 4월∼88년 2월 서울신문 파리특파원

88년 11월∼94년 11월 언론노련 초대·2대·3대 위원장

93년 6월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공동대표

95년 11월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

95년 11월 파업 주도 혐의로 체포

96년 12월∼97년 1월 총파업 주도

97년 10월 국민승리21 대통령 후보

2000년 1월 민주노동당 초대 대표

2000년 4월 16대 총선 출마, 낙선(민주노동당·경남 창원을)

2002년 9월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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