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연기보다 진한 순백의 사랑<KBS2 새 드라마'고독'연하남 류 승 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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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길 가다 당하는 교통사고처럼 아무랑이나 부딪힐 수 있는 게 사랑이야. 사고나는 데 유부남이, 할아버지가, 홀아비가 무슨 상관이 돼. 나면 나는 거지…."('거짓말' 중)

다양한 사랑법에 대한 따뜻하고 예리한 시선이 PD와 작가 사이에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표민수 PD와 노희경 작가는 '사랑'을 잘 풀어나가는 가장 대표적인 방송가 콤비다. 이들이 만든 '거짓말'(1998)'바보 같은 사랑'(2000) 등은 최근 MBC '네 멋대로 해라'처럼 시청률과 관계 없이 골수팬들을 몰고 다니는 매니어용 드라마의 원조다.

21일 방송되는 '고독'이 관심을 모으는 것도 이 둘이 다시 만나 다섯번째로 만드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각각 조연출과 신인 작가로 만났을 때부터 드라마를 보는 시각에서 일치했던 두 사람이다.

표민수 PD는 이번 작품에 대해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속이 텅 빈 고목 같은 여자' 경민의 마지막 사랑 얘기"라고 요약한다. 제목이 '고독'인 까닭은, "세상 사람들이 진정 사랑한다면 고독은 없어질 것이라는 내 개인의 소망을 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상복 기자

지난해 11월 SBS 주말극 '화려한 시절'을 만들던 작가 노희경은 "류승범을 주목하라"고 단언했다. 이 새내기 배우가, 인물의 내면 세계를 제대로 표현하는 능력을 갖췄다고 설명했다. 정확했다. 류승범은 껄렁껄렁하지만 귀여운 철진 역으로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여세를 몰아 영화에도 잇따라 출연했다. 10월, 류승범은 다시 브라운관의 '러브콜'을 받았다. 그를 부른 건 이번에도 노희경 작가다. 주문은 더 복잡해졌다. 그가 맡은 역은 40대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20대 청년. 멜로에는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그가, 연상의 여인과의 성숙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 예사롭지 않은 사랑에 빠진 류승범은 어떤 모습일까. 오는 21일 방송되는 KBS2 TV 월·화 미니시리즈 '고독'의 촬영장으로 찾아갔다.

★ 수줍음, 그 안의 열정

"제가 어딜 봐서 멜로 배우처럼 보여요? 이 얼굴로….(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래도요…, '류승범식 사랑'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요. 저만의 색깔로 사랑을 할 거예요."

사춘기에 막 들어선 소년 같다. 류승범은 '사랑'이란 대목에서 수시로 얼굴이 빨개졌다. 고개를 숙인 채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스물 두살의 청년은 예상 외로 수줍어했다. 담배를 피울 때도 건물 한쪽에서 혼자 피웠다. 이런 그에게서 '화려한 시절'의 발랄한 남자 '철진'이 어떻게 탄생했을까.

"승범이는 순간 포착력이 매우 뛰어난 배우입니다. 카메라 앞에서의 응집력이 대단하다는 거죠. 평소의 그를 보면 상상이 안될 겁니다. 하지만 한번 보세요."

스태프들을 독려하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던 표민수 PD가 말을 거든다.아니나 다를까, 촬영이 시작되자 류승범의 몸이 팽팽히 긴장된다. 서울 강남구 청담동의 한 버스 정류장 앞. 숫기 없던 청년의 모습은 간데 없고, 휴대전화를 든 전도 유망한 회사원으로 변해 있다.

"네, 김부장님. 일은 거의 마무리되고 있습니다. 물론 인쇄물은 점검했죠. 어, 야 진영아."

그를 무시한 채 버스를 타고 떠나는 진영(서원)을 쫓아가다 멈춰서는 영우(류승범).

"다시!"

PD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후다닥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뛰어간다. 일곱번 넘게 같은 동작을 반복했지만, 얼굴은 거꾸로 활기에 넘친다.

"얼마전 제주도 촬영 때 심한 감기에 걸렸거든요. 그 몸으로 물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할 때는 무척 괴로웠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막상 카메라가 눈 앞에 보이면 모든 걸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스님들이 말하시는 '무아지경'이 이런 건가 봐요…."

★ 세 사람의 인연

지난 4월 말 류승범은 영화 촬영 차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 갔었다. 공교롭게도 그곳엔 표민수 PD와 노희경 작가 일행이 와 있었다. '고독'의 시나리오 구성을 위해서다. 세 사람은 발리의 밤바다 앞에서 작품 이야기를 밤새도록 나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가 그 주제였다.

'20대와 40대의 사랑 이야기를 생각하면 불륜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이 차를 극복한 순수한 사랑에 초점을 맞출 순 없을까.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와 레옹의 사랑, 나이를 초월해 서로에게 수혈(輸血)해 줄 수 있는 사랑, 그런 아름답고 진지한 사랑을 그리고 싶다'-이 부분에서 세 사람이 의기투합했다. 그리곤 지난달 초 영화 촬영을 마치고 휴식에 들어가려던 류승범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주연은 네가 맡아야겠다."

처음엔 거절했다. 표민수 PD의 설득은 더 집요해졌다. 결국 세 사람은 발리에서의 사랑론을 함께 풀어 내기로 약속했다.

★ 20대 남자, 40대 여인.

"왜 남자가 반드시 여자보다 나이가 많아야 하나요. 내가 사는 방식은 내가 정해요. 난 사랑하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들 눈치 같은 거 보지 말고."(영우)

"정말…, 겁 없다."(경민·이미숙)

"그래요, 나는 겁 없고 그쪽은 겁보예요. 그래서 우린 어울리는 거고."(영우)

극중 이미숙은 기업 이미지 컨설팅 회사 대표로 15세 된 딸을 키우는 만 40세의 미혼모다. 류승범은 유학을 마친 뒤 경민의 회사에 들어온 25세의 청년. 극 중 나이 차이는 15세지만, 실제 두 사람은 20년 터울이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이런 사랑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고 말한다. "현실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라는 것이다.

이 드라마는 드라마 등급제에 따라 '19세 이상 관람가'가 될 전망이다. 선정성 논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 "젊은 시청자에게는 사랑의 순수성과 숭고함을 보여주고, 중장년 층에게는 고독한 인생에 위로가 될 만한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게 제작팀의 다짐이다.

이상복 기자

jiz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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