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엄' 대통령 대망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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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나는 진화생물학자다. 그래서 다루는 시간 단위가 우습게 백만년을 넘나든다. 예를 들면 인류의 조상이 침팬지의 조상과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약 6백만년 전임을 밝히고 그 의미를 논의한다. 기껏해야 1백년도 채 못 사는 우리에게 6백만년 전은 상상도 못할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지구의 역사 46억년을 시계 한 바퀴로 치면 11시59분을 훌쩍 넘긴 때였다.

그런데 이처럼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동물이 내일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할 것처럼 살고 있다. 특히 우리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을 보면 종종 피란을 다니는 임시정부가 허둥대는 모습처럼 보인다. 백년대계여야 한다는 교육정책이 길어야 수년 단위로 바뀌고 있으니 더 무엇을 말하랴.

이제 곧 우리는 이 나라를 이끌 지도자를 선출하게 된다. 누가 이 험악한 21세기의 파도를 뚫고 우리를 번영의 길로 인도할 수 있을 것인가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이다. 나는 감히 '두엄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부르짖고 싶다. 집권 당대에 자신의 영광을 위해 뭔가 가시적인 업적을 내려 무리하게 서두르는 대통령이 아니라 다음 대통령들이 보다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도록 웅덩이를 파고 풀이나 짚을 썩여 두엄을 만드는 그런 대통령 말이다.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추앙받는 세종대왕은 물론 그 자신이 뛰어난 능력과 덕성을 지닌 보기 드문 인물이기도 했지만 그를 위해 온갖 사회적 기반을 마련해준 선왕 태종의 은덕을 입은 임금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7년 10개월에 걸친 태종의 준비작업이 세종 31년 6개월의 태평성대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취임 전에 개헌이 되지 않는 한 차기 대통령의 임기는 겨우 5년이다. 먼 훗날을 내다보며 기꺼이 두엄을 준비하는 대통령을 보고 싶다.

세종의 성공을 집현전의 효율적인 운영에서 찾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집현전은 이미 고려시대에 설립된 기관이었지만 세종 대에 와서야 확실한 정책적 배려가 주어졌다. 젊고 유망한 학자들을 채용해 그들이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지원하는 것은 물론 온갖 특전을 다 베풀었다. 그들이 훗날 훈민정음의 체계를 완성하고 혼천의 같은 천체 관측 기계와 측우기 등을 만들어 백성의 생활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바로 그 학자들이다.

미국에는 하버드대·미시간대·컬럼비아대 등에 미국의 집현전이라 부를 만한 특별연구회(Society of Fellows)가 있다. 이들은 해마다 박사학위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자 중 특별히 우수한 인재들을 젊은 연구원(Junior Fellow)으로 선발해 3년간 조교수 월급 수준의 장학금과 소정의 연구비를 지급한다. 가장 연구력이 왕성할 때 생활비 걱정 없이 학문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제도다. 많은 미국의 석학들이 이 특별연구회 출신들이다. 나도 돌이켜보면 미시간대 특별연구회의 연구원으로 지낸 3년간이 내 학문의 황금기였다.

'백년지계 막여수인(百年之計 莫如樹人)'이라는 옛말이 있다. 백년지계로는 사람을 기르는 일처럼 중요한 게 없다는 말이다. 다시금 집현전을 부활시켜줄 지도자를 꿈꾼다. 해마다 기초학문을 중심으로 젊은 학자 1천명을 선발해 한 5년간 지원해보자. 생활비와 약간의 연구비를 합해 1년에 4천만원 정도면 될 것이다. 기껏해야 4백억원의 예산만 책정하면 되는 일이다. 5년 후면 무려 5천 개의 두뇌들이 이 나라의 앞날을 위해 반짝일 것이다. 나라의 앞날이 그만큼 더 밝아질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리라.

흐루시초프처럼 "강물도 보이지 않는데 다리를 놓아주겠다"며 목청만 높이는 정치인이 아니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은 그저 몇 개의 주춧돌을 쌓겠다는 지도자를 보고 싶다. 단번에 세종이 되겠다며 날뛰기보다는 훗날 나타날 여러 명의 세종들을 위해 기꺼이 태종이 되겠다는 여유 있는 후보를 뽑고 싶다. 지금 우리 나라는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선진국 대열로 올라서느냐, 아니면 기초부터 무너져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마느냐 하는 기로에 놓여 있다. 5년 너머를 내다보고 준비할 수 있는 대통령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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