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에서 중심으로 … 한국 여자축구 ‘소녀시대’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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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환경에서도 태극낭자들은 한 송이 꽃을 피워냈다.

20세 이하(U-20) 여자축구 대표팀이 1일(한국시간) 콜롬비아와의 FIFA U-20 월드컵 3·4위전에서 1-0으로 승리해 세계 3위에 오르는 새 역사를 썼다. 두터운 선수층에다 엄청난 지원을 받는 남자 축구도 이뤄내지 못한 쾌거였다.

시작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으로 축구 열기가 뜨겁게 달궈졌지만 U-20 여자 대표팀은 지난 7월 초 무관심 속에 대회가 열리는 독일로 출국했다. 주장 김혜리(여주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는 “지금은 이렇게 나가지만 돌아올 땐 환영을 받으며 돌아오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지소연이 콜롬비아와의 3·4위전에서 후반 4분 결승골을 터뜨린 뒤 팔을 활짝 벌리며 달려나가고 있다. 드리블·슈팅·패스에 모두 능한 지소연은 이번 대회에서 8골로 독일의 포프에 이어 득점 2위에 올라 실버슈를 받았다. [빌레펠트(독일) 로이터=연합뉴스]

지난달 14일 스위스와 첫 경기에서 4-0 대승을 거둔 대표팀은 가나와의 2차전에서 4-2 역전승을 거뒀다. 한국은 2연승을 거두며 일찌감치 8강 진출을 결정지었다. 8강전에서 멕시코를 3-1로 꺾고 4강 고지를 점령한 한국은 준결승에서 홈팀 독일의 벽을 넘지 못했다. 힘과 체격에서 밀리며 1-5로 대패했지만, 3·4위전에서 콜롬비아를 이기며 금메달만큼 값진 동메달을 안았다.

이번 대회에서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지메시’ 지소연의 발굴이었다.

스위스전에서 해트트릭을 올린 지소연은 가나전에서 2골을 추가하며 대회 초반부터 각광을 받았다. 결국 6경기 8골을 터뜨리며 대회 ‘실버슈’를 수상한 지소연은 미국·독일 프로팀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았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의 찬사도 들었다. 블라터 회장은 1일 FIFA 홈페이지와 인터뷰에서 “이번 대회 한국의 선전은 기분 좋은 깜짝 선물이었다. 한국은 매력적인 축구를 선보였는데, 기술적 재능이 뛰어난 지소연이 플레이 메이커로 큰 몫을 했다”며 “지소연은 이번 대회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고 칭찬했다.

스타로 떠오른 건 지소연뿐이 아니다. 가나전에서 뺄랫줄 같은 40m 프리킥 골을 기록한 김나래(여주대)는 ‘한국 여자축구의 미래’로 주목을 받았고, ‘미녀 골키퍼’ 문소리(울산과학대) 역시 뜨거운 관심의 대상이 됐다.

최인철 감독의 리더십도 화제였다. 최 감독은 슛 자세와 위치까지 일일이 일러주는 꼼꼼한 지도력으로 선수들의 능력을 한 단계 올려놨다. 독일과의 준결승에서 진 뒤에는 선수들의 방을 일일이 찾아가 “괜찮다. 이제 3위에 올라 새 역사를 쓰자”고 선수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감성 리더십’도 발휘했다.

숙제도 받았다. 무엇보다 한국 여자 축구 자원이 변변치 않다. 실업팀 7개를 비롯해 전국의 여자축구 팀은 모두 65개에 불과하다. 이번 대회를 계기로 ‘반짝 관심’이 아닌 여자축구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한국 여자축구는 11월 광저우 아시안게임을 통해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할 채비를 하고 있다. 남자 대표팀은 23세 이하 선수들이 주축으로 나서지만 여자는 성인 대표팀이 출전한다. 지소연도 성인 대표팀에 합류해 메달 사냥에 나설 예정이다.

온누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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