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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따문화를 '왕따'시키자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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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61면

직장 내에서 특정 직원을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왕따 현상'이 번지고 있다. 학교나 군대에서 왕따 현상은 이유 없이, 무의식적으로 벌여지지만 직장에서는 경쟁·줄서기·집단 이기주의 때문에 의도적으로 행해진다. 왕따에 따른 스트레스로 쓰러졌다면 업무상 재해로 봐야 한다는 법원 판결도 나왔다. 왕따가 모두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하는 사람이나 남부럽지 않은 왕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가장 큰 죄악은 소외(疏外)시키는 것'이라는 철학자 헤겔의 말처럼 왕따 현상은 건강한 직장인 문화를 멍들게 하고 있다. 삼호중공업이 간부급 관리자와 현장 직원 등을 상대로 '우리 회사의 바람직한 기업문화 형성에 가장 큰 걸림돌이 뭐냐'고 설문한 결과 응답자의 절반 이상이 '왕따 현상'을 지목했다. 서울대 김성수(경영학·인사조직 전공) 교수는 " 왕따현상은 직장 내 의사소통 구조를 왜곡해 기업의 생산성을 저하시킨다"며 "소수를 보호하고 존중하는 협동적 직장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출세하고파

시 중은행에 다니는 김모(29)주임은 4년 동안 무려 다섯번이나 직장을 옮겨다녔다. 이유는 가는 직장마다 '집단 따돌림'을 당했기 때문이다. 명문 사립대를 졸업한 그는 해운회사·투자신탁사 등 유망한 직장에 취직했다.

그러나 金씨는 "억대 연봉의 외국계 회사로 갈 것이다" "이곳은 내 인생의 간이역에 불과하다"는 말로 주변 동료의 심기를 건드렸다. 金씨는 "왕따를 당해 직장을 여러번 옮겼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대학 동기보다 연봉이 높다"며 왕따다운 발상을 보였다.

전자업종에 근무하는 정모(34)씨는 지난해 말 회사 감사실에 팀원의 비리를 제보했다. 그러나 다른 동료들은 비리 혐의가 있는 팀원을 보호했고, 鄭씨는 남을 음해한 투서꾼으로 몰렸다. 동료들은 鄭씨가 승진하기 위해 경쟁 상대를 음해했다고 생각,그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회의 시간에 鄭씨를 거래처에 보내며 외곽을 맴돌게 했다. 鄭씨는 올 초 인사 때 부서를 옮겼지만 그 곳에서도 '출세지상주의자' '배신자'로 몰렸다. 결국 그는 며칠 뒤 회사를 떠났다.

가족때문에

외 국계 회사에 다니는 김모(43)부장은 한달에 한번 있는 회식에 참석하지 않는다. 한해에 한두번 있는 체육대회·야유회에도 나가지 않는다. 金부장은 집안일을 핑계로 댄다. 金부장은 딸 두명을 예술계 중·고교에 보내고 있다. 두 딸의 등·하교 시간 및 레슨 시간 때문에 회식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이다. 부원들과 멀어진 관계는 다시 좁힐 수 없었다. 부원들은 부장의 지시에 고개만 끄떡일 뿐 말로 대답하지 않는다. 金부장는 점심 시간마다 집에서 싸온 빵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다.

대형 로펌에 다니는 최모(40)변호사는 오후 6시가 되면 바로 집으로 향한다. 특수학교에 다니는 장애아 아들(10)을 집으로 데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정 때문에 동료 변호사와의 회식은 물론, 고객과 만나는 자리에도 못가기 일쑤다. "처음에는 회사나 동료들이 집안 사정을 이해해줬지만, 시간이 갈수록 동료들과 멀어진다"면서 "직장은 옮기면 되지만 가족은 바꿀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환경차이로

줄 곧 서울에서 자란 강모(28)씨는 지난해 지방 도시에 있는 지사로 발령받았다. 낯선 환경인 만큼 康씨는 동료들과 친해지려고 애를 썼다. 술자리에 참석하고 주말 등산모임에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동료들과 멀어졌다.

오히려 서서히 자신을 빼놓고 부원들이 모임을 갖고, 인터넷 동호회도 만들었다. 동료들과 얼굴 붉힐 일이 전혀 없었기에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화가 난 康씨는 동료 L씨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의 대답은 간단했다. "당신은 조만간 서울로 떠날 사람이다. 당신을 남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康씨는 사표를 내고 바로 짐을 싸 서울로 향했다.

왕따를즐긴다

직 장생활 7년차인 서모(33·여)씨는 언제나 혼자 술집에 간다. 알콜중독자나 애주가도 아니다. 徐씨는 "그저 직장도 집도 아닌 나만의 장소에서 나를 돌아보고 싶을 따름이다"고 말했다. 그녀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쓰지 않는 서구에선 혼자 술마시는 것이 시선을 끌 만한 일이 아니다"며 왕따임을 숨기지 않았다.

강병철 기자

bong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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