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정치 찾기] 유세차 대신 자전거, 연설 대신 포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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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 선거운동 개념으로 보면 무모했다. 그러나 여당에 대해 곱지 않은 재·보궐 선거 민심을 뚫기 위해 고육지책으로 꺼내 든 ‘변칙’은 통했고, 이제 한나라당 내에서 그 변칙은 무용담이 되고 있다. 7·28 서울 은평을 재선거에서 이재오 당선자가 선보인 ‘나홀로 선거운동’ 얘기다.

지난 1일 예비후보로 등록한 이 당선자는 참모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스스로 생각한 ‘나홀로 선거운동’ 방안을 공개했다. 이른바 ‘5계명’이었다.

“중앙당을 선거에서 배제한다.” “국회의원·연예인, 아무도 못 오게 하라.” “선거운동원들도 삼삼오오 다니지 말고 혼자 다녀라.” “선거사무소를 폐쇄하라.” “선거전략회의도 길거리에서 하라.”

참모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이 당선자의 뜻은 확고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이 당선자는 로고송, 후보 유세차량, 후보 수행원 없는 ‘3무(三無)’ 선거를 치렀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27일)을 빼곤 마이크를 잡고 연설을 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30만원짜리 국산 자전거와 헬멧, 자전거에 매단 ‘기호 1번’ 깃발이 선거운동 도구의 전부였다. 대신 그는 낮은 자세로 유권자들의 손을 한 번이라도 더 잡고, 한마디라도 더 얘기를 나누는 데 전념했다.

은평뉴타운 상가조합에 갔을 때의 일이다. 미분양 문제 때문에 조합원들이 불만을 터뜨리자 그의 답변은 이랬다.

“뉴타운 때문에 (나를 지지했던 원주민들이 떠나) 나도 아주 신세 조졌어요.” 고상한 말이 아닌 속어는 오히려 조합원들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넓히는 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악수를 나누다가 한나라당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는 유권자들이 있으면 “에이, 그러지 마세요” 하면서 포옹도 해 버렸다.

이 당선자의 김해진 공보특보는 “야3당 대표들이 보름씩 연설하느라 목청을 높였지만 그런 웅변식·주입식 선거운동은 이번에 통하지 않았다”며 “유권자 눈높이에 맞춰 쌍방향으로 소통한 게 진정성을 인정받은 것 같다”고 분석했다.

이 당선자는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자정까지 지역을 누볐다. 이 당선자는 물론 선거운동원들까지 ‘나홀로’ 다니면서 일대일로 주민과 접촉했다. 이 당선자는 예비후보 등록 첫날(7월 1일) 명함을 3000장 돌렸다고 한다. 하루 3000명을 만난 셈이다. 27일까지 추산하면 8만 명 정도가 된다. 은평을 유권자는 약 20만 명. 유권자의 40% 정도를 접촉한 셈이다. 20만 유권자 중 8만4000여 명이 투표했으니 그가 만난 사람은 총투표인 수와 맞먹는 셈이다.

경희사이버대 안병진(미국정치학) 교수는 “미국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선거) 때는 후보들이 유권자들을 세 차례 정도 만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미국 정치에선 유권자들과의 대면 접촉이 활발하다”며 “이 당선자가 영악할 정도로 낮은 자세로 밑바닥을 샅샅이 훑은 게 승리 요인”이라고 평가했다.

선거운동 기간 중 야권에선 정세균·손학규·정동영·박지원(이상 민주당), 유시민(국민참여당) 등 ‘거물’들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은평에 출현했다. 불광역이나 연신내역 주변은 늘 ‘물 반 야당 운동원 반’이었다. 장상 민주당 후보가 유세 마이크를 잡으면 간판 정치인들이 둥글게 띠를 둘렀다. 전통적인 ‘세몰이 운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물량 공세는 거꾸로 이 당선자의 ‘나홀로 선거운동’을 부각시키는 역효과를 낳았다.

선거캠프 해단식이 열린 30일 이 당선자는 ‘4당5락’을 말했다. 하루 4시간 자면 당선하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며 자기 체면을 걸었다는 거다. 고향인 경북 영양에 사는 조카에겐 자기가 낙선할 경우 내려가 살 수 있게 빈집 하나를 구해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는 뒷얘기도 공개했다.

한마디로 “죽을 각오로 선거를 치렀더니 이기더라”는 거였다.

 강민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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