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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사이 "말로 해야 아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말로 해야 아나?

중년의 삶을 지나쳐오는 동안 본 것,들은 것,겪은 것이 주는 지혜가 백만 광주리라고 해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대사는 이거다. "그걸 꼭 말로 해야 알아?" 물론, 이심전심이나 염화시중의 미소 같은 고상한 경지에 다다르기엔 내 마음이 지나치게 때묻어 있음을 부정하지 않겠다. 말을 안해도 '척 하면 삼천리고 악 하면 낭떠러지'인 그런 상태가 부럽긴 하다. 그러나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람이 말을 안 하면 귀신도 모르고, 벙어리 속은 제 에미도 모른다'는 우리나라 앞선 벗들의 경구가 더 옳다고 생각한다.

사람들 사이에 관계가 이루어지면 궁금한 것들이 사태가 나는데, 대관절 말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상대의 속을 헤아린다는 걸까? 연인이 생겼을 때,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좋긴 좋은지, 좋다면 무엇이 좋은지 궁금해하는 건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의 궁금증은 상식적이지 않다고 했다. 그건 대답하지 않아도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고. 거기다 내가 "왜 그런지 세 가지 이유를 대봐"라고 덧붙이면 그들은 작정하고 곤혹스러워한다. 세 가지만 말해달라는 건, 한두 가지 대답만으론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그 세 가지를 열거하며 대답을 해준 사람을 만난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리고 그들은 날 핀잔한다. "뭐가 좋은지 꼭 말로 해야 아니?"그때 나의 대꾸는 이렇다.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러나 하나가 없이 다른 하나가 존재할 순 없다.그건 인생의 두 얼굴이니까. 한 연극배우가 말했다. "이젠 말하는 것도 싫고 쓰는 것도 싫어. 말하면 말한 그대로,쓰면 쓴 그대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모두 다 자기들 편한 대로만 해석하는 걸." 그 말을 듣는데 마음에 골다공증 걸린 뼈 같은 구멍이 났다. 나도 딱 그 심정이었으니까. 얼마 전, 회사 상사에게 몇년에 걸쳐 불편했던 마음을 e-메일로 보냈다. 오랫동안 보낼까 말까로 갈등했기 때문에, 그 메일은 나의 회의와 불쾌와 무례의 이유를 담느라 아주 길어져버렸다. 그에게서 역시 긴 답신이 오고 우리 사이의 긴 침묵을 깰 순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주고받았던 건 서로의 메일에 대한 반박과 재반박일 뿐이었다. 무엇을 되찾겠다고, 그런 말들이 무슨 소용있다고. 나는 망가져버린 관계의 형해만 확인하고 만 걸까. 묶인 것을 풀자고 꺼낸 이야기들이, 말을 묻어둔 것만 못했던 결과를 나는 너무 많이 보았다.말은,정말 말에서 생긴 힘밖에는 아무 것으로도 회복할 수 없으니까.

이충걸·『GQ KOREA』편집장

norway@doo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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