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치미술품 보존' 미술관 골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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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현대미술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은 설치미술품은 어떻게 보존해야 할까.

요즈음 미술관 큐레이터들과 미술품 보존.수복가들 앞에 떨어진 숙제다. 몇 십, 몇 백년이 지나도 보관만 잘 하면 원 상태와 크게 달라지지 않는 유화나 조각과 달리 잘 부서지고 일시적인 특성을 지닌 여러 재료들을 쓰는 설치미술이 이제 미술관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지난해 6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한국현대미술의 전개:전환과 역동의 시대'전은 그 본보기다.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지 않은 1970년대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미술들을 정리하려는 기획 의도와 달리 작품의 복원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정찬승.정강자씨 등 몇 몇 작가들이 사라져버린 구작을 도록과 사진 자료 등으로 되살리는 과정에서 원작을 훼손하면서 안 하느니만 못하게 된 상황이 벌어졌다.

이승택씨는 공간이 커지자 과거의 작품 크기를 키워서 본의 아니게 실제를 왜곡시키기도 했다. 한국 현대미술사 정립을 위해 복원한 작품을 소장하려던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교훈만 얻고 꿈은 접어야 했다.

공간 전체를 조형화하는 설치미술이 늘어나면서 작품이 아예 사라지는 일도 많아졌다. 서울 대학로에 있던 인공갤러리가 문을 닫으며 건물이 헐리자 그 벽에 리처드 롱이 진흙으로 남긴 '벽 드로잉'까지 철거됐다. 청담동 가인화랑에 10m짜리 드로잉을 했던 김춘수씨는 이제 그 작품을 찾을 길이 없다.

크기나 재료, 복잡한 구성 외에 설치미술 보존이 더 어려운 건 그 작품이 놓였던 공간의 문제가 얽히기 때문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가 70년대에 만든 'TV 정원''TV 침대'는 작가가 어두운 공간에 놓으라는 단서를 붙였으나, 각 미술관으로 순회될 때마다 그 지침이 지켜지지는 않았다는 것이 백씨 작업실 설명이다.

한국보다 설치미술의 역사가 길고 경험이 많은 외국 미술관들도 이 난제를 풀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지난 2월 70년에 사망한 독일 출신 설치미술가 에바 헤세의 회고전을 열었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큐레이터들은 겨우 30여년이 지난 2002년 시점에서 그의 주요한 작품들이 다 망가져 버렸음을 알고 당황했다.

20세기 후반기 미술사가 제대로 서술되려면 미술관 관계자들이 서둘러 전투를 치르듯 해야 할 일이 쌓여 있는 셈이다.

이를 위해 구겐하임 미술관 보존과에서는 설치미술품의 사진 자료는 물론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작품을 만들 때의 생각, 공간의 정확한 설명 등을 영상자료로 첨부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작품 앞에서 작가가 부분 부분의 느낌까지를 큐레이터와의 대담으로 남기기 때문에 나중에 다시 설치할 때 정확한 고증이 된다고 한다.

미술품 보존 전문가인 최명윤씨는 "각 미술대학에서 재료학에 대한 인식이 없고, 학과목에 넣지 않아 작가들이 새로운 소재들을 쓰면서도 그 재료의 특성이나 수명 등을 고려하지 않아 작품이 손댈 수 없게 망가지는 경우를 많이 본다"고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아예 보존 개념이 없기에 차라리 행위예술에 가까운 설치미술도 늘어나는 추세"라고 걱정했다.

김찬동 문예진흥원 전문위원은 "더 늦기 전에 우리 미술계도 설치미술을 본디 모습대로 보존할 수 있는 작가들의 자각과 보존 전문가들의 연구가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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