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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봉사하다 죽은 외국인의 안식처, 양화진 묘지 조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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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88년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 이곳의 정경은 일제 강점기에도 이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1938년 한 잡지는 ‘일광(日光)에 반사하여 더욱 더 정채(精彩)를 발하는 흰 대리석의 여러 석비(石碑)와…무덤 한가운데에 깨끗한 돌로 전석을 하얗게 깐 품이 음산한 무덤 같지 않고 흡사 공원 같다’고 기록했다(‘삼천리’ 1938년 8월 호).(사진 출처:『SEOUL’88』)

기나긴 세월 농경에 의지해 살아온 까닭에 한국인들은 사람을 식물에 비유하는 문화를 형성했다. 어린이를 ‘새싹’이라 부르고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을 ‘거목(巨木)’이라 하며 평생 살 집이나 직장을 구하면 ‘뿌리내린다’고 한다. 누군가 한국인의 기질적 특성 중 하나로 꼽은 ‘끈기’도 기실 ‘근기(根氣)’이니 나무뿌리처럼 단단히 박혀 흔들리거나 뽑히지 않는 기질을 말한다.

산 사람이 뿌리내리는 곳은 집이요, 죽은 사람이 정착하는 곳은 무덤이다. 조선시대에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벼슬살이하던 젊은이가 죽으면, 며칠이 걸리더라도 친지들이 시체를 떠메고 그의 고향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밥은 밖에서 먹어도 잠은 집에서 자는 관습은 타향살이를 하다가도 죽은 뒤에는 고향에 묻히는 규범과 짝을 이뤘다.

1890년 7월 26일, 제중원 의사로 있던 미국인 헤론(John W Heron)이 서울에 들어온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조선 정부와 서구 각국 사이에는 이미 그 이전에 ‘외국인 장지(葬地)’ 문제에 관한 협의가 있었으나, 조선 정부는 이를 그리 심각하게 다루지 않았다. 죽은 이가 무엇 때문에 먼 타국 땅에서 영면(永眠)하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미국 공사는 빨리 장지를 마련하라고 독촉했지만, 그냥 두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하는 심사였던지 조선 정부는 모르쇠로 버텼다. 한여름 무더위에 더 이상 시신을 방치할 수 없으니 집 마당에라도 안장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뒤에야 조선 정부는 부랴부랴 묏자리를 구하러 나섰다. 도성 안에는 왕조차 묻힐 수 없는 법인데 하물며 외국인이랴.

조선 정부가 찾아낸 곳은 한강변 양화진이었다. 이곳은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함이 나타났던 곳이었고, 1882년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개시장(開市場)’으로 정한 곳이기도 했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신부를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처형된 곳도 여기였다. 이래저래 외국인 묘역으로 양화진만 한 곳도 없었다. 7월 29일 헤론을 묻은 뒤 조선 정부는 이 일대의 땅을 동전 705량으로 매입하여 묘지의 권역을 일차 확정했다. 묘지 권역은 그 뒤 여러 차례 확장되었는데, 땅값은 모두 조선 정부가 부담했고 외국인들이 위원회를 꾸려 관리했다.

지금 이곳에는 555기의 외국인 무덤이 있다. 그들 중에는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는 문구를 묘비에 새긴 헐버트(Homer B Hulbert)처럼,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사람도 많다. 이제 한국은 그들에게 진 빚을 다른 이들에게 되갚을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