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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24>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28.가요상을 휩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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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팬들의 입에 '하숙생'이 자주 오르내리자 일부에서는 "이제 지겹다"는 소리도 나왔다. 아무 방송이나 틀면 이 노래가 나오니 그럴 만도 했다. "최희준 밖에 가수가 없냐"는 불평도 들렸다. 과장 같지만, 이게 당시의 실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나도 손해를 보았다. 거의 동시에 나온 노래 '종점'(유호 작사·이봉조 작곡)이 '하숙생'에 가려 빛을 좀 잃은 것이다. "너를 사랑할 땐 한없이 즐거웠고/버림을 받았을 때 끝없이 서러웠다/아련한 추억 속에 미련도 없다마는/너무도 빨리 온 인생의 종점에서/싸늘하게 싸늘하게 식어만 가는/아~내 청춘 꺼져 가네."

따지고 보면 행복한 넋두리일 뿐이었다. '하숙생'에 비할 바는 못됐지만, 이 노래의 인기도 굉장했다.청춘의 황금기에 생을 마감해야 하는 한 사내의 회한을 담은 노랫말의 깊이는 '하숙생'의 그것 못지 않았다.

그러나 이 노래의 스타일과 색깔은 '하숙생'과 전혀 달랐다.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으로서 그 덕을 상당히 본 '하숙생'과 달리 '종점'은 레코드로 많이 팔렸다. 10만여장쯤 팔린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수치였다. '하숙생''종점'을 내면서 오아시스에서 신세기로 레코드 회사를 옮긴 터라 기쁨은 더했다.

나는 두 곡의 선전으로 66년 12월 MBC 최고 인기 가수상을 거머쥐었다. 가요계에서는 '가수왕상'으로 불렸다. 당시 시상식 사회를 임택근 아나운서가 맡았다. 팬들의 인기투표로 선정했는데, 최종 결선에서 이미자씨와 맞붙었다.

운이 따랐는지 결과적으로 내가 이겼다. "제1회 MBC 최고 인기가수상 최희준. 축하합니다." 任아나운서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나는 살며시 李씨에게로 다가가 "내년엔 미자씨의 몫이다"며 위로했다. 그 예언이 적중했던지 다음해 李씨가 그 상을 탔다. 李씨와 이런 저런 인연 때문에 내가 상을 탄 것만큼 기뻤다.

이 무렵 나는 꽤 상복이 많았다. 64~66년 TBC 가요대상 3연패를 했다. 첫회는 남녀 가수를 통틀어 한 명에게 상을 주었으나 이듬해부터 남녀 가수를 구분했다. 첫회 신인 가수상은 '내 이름은 소녀'를 부른 조애희가 탔다. 두번(67년은 배호, 68년은 남진이 탔다)을 거르고 69년에 다시 남자 가수상을 타며 건재를 과시했다.

참 깜박 잊은 게 있다. '하숙생'은 드라마와 주제곡이 히트하자 여세를 몰아 곧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김지미·신성일씨가 주연이었고, 정진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흥행성적도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른바 하나의 재료를 가지고 여러가지를 확대 재생산하는 '원 소스 멀티 유스'라는 흥행전략이 오늘날에만 통한 게 아니었다. 60년대도 나름대로 그런 기능이 있었다. 라디오 드라마·노래·영화의 3단계 전략이 구사됐다.

'하숙생'을 특히 좋아했던 사람으로 가장 인상적인 분은 경기도 의왕의 성 라자로 마을을 일군 이경재(1926~98년) 신부님이었다. "'하숙생'을 듣다 보면 욕심이 없어져요.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공수래 공수거'야말로 인생의 진리가 아니겠어요." 李신부님의 또렷한 말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하다.

李신부님은 50년대 천주교 신부로는 최초로 한센병 환자 수용시설인 성 라자로 마을 초대 원장을 자청하며 구호사업에 투신한 인물이다. 40여년간 환우에 대한 봉사로 일관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나는 성당의 제단(祭壇) 앞에서도 이 노래를 꽤 많이 불렀다. 나는 90년 성탄절 무렵 '디 모테오'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스스로 독실하다면 불경스러운 일이겠지만 '하숙생' 노래가 성스러운 교회에서 불릴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고 있다.

인생에서 이처럼 기념할 만한 뭔가를 갖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40여년 가수 생활 동안에 진저리 날 정도로 실증날 때도 있었지만, 그대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은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이런 노래 덕분이 아닌가 한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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