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딩크 집착 너무 심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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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최근 축구팬들은 월드컵 4강의 주역들이 출연하는 '삼류 치정극'을 보고 있다. 줄거리는 이렇다."대한축구협회의 구애를 받아들여 옥동자를 순산한 거스 히딩크는 출산의 임무가 끝나자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떠났다. 안방을 비워둘 수 없었기에 히딩크의 도우미였던 박항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협회는 '미모가 떨어지는' 박항서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협회의 마음은 계속 히딩크에 가 있었다. 박항서와의 첫날 밤에 히딩크를 불러들였고, 그에게 틈나는 대로 돌아와 안방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재결합 1순위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다. 견디다 못한 박항서는 급기야 이웃에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협회는 감히 나에게 도전한다며 징계를 거론하기에 이르렀다-."

축구협회의 히딩크 집착과 의존이 너무 지나치다. 홍보효과 만점인 히딩크를 붙잡기 위해 둔 각종 무리수가 이처럼 월드컵 영웅들을 졸렬한 치정극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결과적으로 한국 축구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게 했다. 남북 통일축구 경기에서 히딩크를 벤치에 앉도록 한 것, 히딩크 복귀를 염두에 두고 박항서 체제를 과도체제로 몰아가는 것, 수시로 불러 A매치의 지휘봉을 잡도록 하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 등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게 한둘이 아니다.

박항서 감독이 자신에 대한 푸대접에 반발하자 협회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누구 덕분에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데…'라고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협회 고위 관계자들은 10일 "박항서 감독 문제와 관련해 기술위원회와 긴급 상임위원회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한 관계자는 "징계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히딩크 감독이 한국을 월드컵 4강에 진출시킨 훌륭한 지도자며, 한국 축구를 선진화시킨 주인공이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양새 사납게 그를 계속 붙잡고 늘어져야 할 이유도 없다. 그를 한국에 남도록 할 수 없었다면 새로운 외국 지도자를 영입해 선진 축구의 흐름을 이어가게 하거나, 히딩크로부터 많은 교훈을 얻은 국내 지도자에게 그의 유산을 계승하도록 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나가면 큰 업적을 남긴 히딩크 본인에게까지 누를 끼치게 된다.

차기 감독이 사실상 내정된 상황에서 어렵게 감독직을 수락한 박항서 감독이다. 박감독은 10일 "아시안게임 때까지 최선을 다한 뒤 그다음 문제는 그때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20일도 남지 않은 부산아시안게임 준비 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랄 판에 축구 외적인 목적을 위해 축구판을 흔들어대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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