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그리고 태극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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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주말 남북 통일축구 경기가 있었던 상암월드컵경기장은 두달 전 태극기 물결로,'대~한민국'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그 곳이 아니었다. 같은 목소리, 한 마음이 머물던 경기장에서는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 대회의 주최자들은 태극기 대신 한반도기를 사용하고 '대~한민국' 대신 '통~일조국'이라는 구호를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북한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대한민국과 태극기임을 의식해서 일 것이다. 대회장 입구에서 운동권 학생들로 보이는 대학생들은 한반도기를, 나이가 지긋이 든 분들은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정부의 권장에도 불구하고 관중들은 계속 '통~일조국' 대신 '대~한민국'을 외쳤으나 경기장 밖에서는 무슨 연합이니 하는 이름을 붙인 대학생들이 '통~일조국'을 외쳐댔다. 남남분열의 또 하나의 현장이었다. 태극기와 한반도기, 대한민국과 통일조국은 무엇이 다르길래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우리는 무엇을 사용해야 옳은 것인가.

분열된 이 나라의 처지를 생각할 때 통일된 한반도를 그린 깃발도 그럴듯해 보이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처럼 '통~일조국'을 외쳐도 크게 잘못된 것이 없어 보인다. "남북이 사이좋게 지내자면 그렇게라도 해야 한다""스포츠인데 국기나 국호가 무엇이 중요한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극기와 한반도기, 대한민국과 통일조국은 상반된 가치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장래의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통일의 소중함과 필요성에 공감한다. 그러나 통일은 두가지 측면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는 민족 입장에서의 통일이며, 다른 하나는 체제 측면에서의 통일이다.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느냐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민족에 강조를 두는 사람들은 공산주의를 포함해 무슨 체제가 됐든 통일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반면 체제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공산주의로 통일이 되기보다 통일이 더디더라도 남쪽의 자유민주주의를 유지하는 것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통일 우선주의를 내세운 쪽은 북한과 남쪽의 일부 진보세력이고 남쪽 보수세력은 체제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태극기와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상징한다. 우리가 대한민국을 자랑스럽게 외친 이유는 우리 체제가 옳았다는 확신에서다. 그런데 그 대~한민국과 태극기를 통~일조국과 한반도기로 바꾼다는 것은 통일 문제에 관해 우리 입장이 변화할 수 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라는 체제문제보다 통일이 우선이라는 통일 지상주의를 수용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니까" "단일팀을 만들기 위해…"라는 논리로 당의(糖衣)를 씌워 통일 지상주의의 논리를 암묵적으로 전파하는 것이다.

깃발은 상징이며 존재 의미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1백50년이 가까워 오는데도 미국 남부주들은 당시의 깃발을 잊지 못해 곳곳에 걸어 놓는다. 남부 어느 주는 최근 주 청사에서 남부군 깃발을 내리는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었다. 왜 이들은 남부군기를 고집할까. 그 깃발이 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 주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 베트남은 패망한 월남 사람의 입장을 살려주기 위해 제3의 국기를 만들지는 않았다. 독일도 통일 됐다 하여 동독 사람들의 자존심을 위해 다른 깃발을 만들지 않았다.월맹기가, 서독기가 통일국가의 깃발이 됐다.

통일문제를 접근하는 데서도 양보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부분과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의 문제가 있다. 같은 민족으로서, 동포로서 쌀과 전기를 주고,경제를 부흥시키는 문제들은 얼마든지 협상이 가능하다. 그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체제의 문제만은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선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공산주의로의 통일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곧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체제의 상징인 태극기가 소중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해와 통일을 위해 김정일의 방한을 환영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태극기 없이 평양에 들어갔지만 김정일의 방한 때는 인공기를 달고 오는 것까지 용인해야 할지 모른다. 북한이라는 현실적 존재를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일이 있다. 우리는 태극기를 손에 들고 '대~한민국'을 외치며 그를 환영해야 한다. 통일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우리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노 선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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