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보그는 미래의 희망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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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흥미로운 것은 그 대목이다. 풍자적인 정치신화에 가까운 이런 급진적 미래전망을 쓴 사람이 과연 자연과학자 출신이 맞을까 하는 생각부터 든다. 기존의 잣대로 볼 때 장르 구분도 불가능하다. 분위기는 포스트모던하고, 정교하고 깊숙한 생물학적 지식이 툭툭 튀어 나온다. 여기에 페미니즘 시각까지 결합시켰다. 그러고 보니 이 책은 한국영미문학페미니즘학회의 번역총서 제1권으로 선보였다.

발표된 지 11년 만에 국내에 소개되는 해러웨이의 이번 책은 읽어내기 쉽지 않다. 해독불가능한 책은 아니지만, 공들인 번역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는 대목이 적지 않다. 그 주된 이유는 서구·한국사회 사이의 정보 격차 때문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의 밀도 높은 서술은 책읽는 이들에게 '초압축 파일'로 다가선다. 충분한 사전정보가 필수인 것은 그런 까닭이지만, 결정적인 대목은 따로 있다. 자연과학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버리길 요구하기 때문이다.

즉 해러웨이가 내내 강조하듯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자연과학'이라는 통념부터 내던져야 이 책 논의의 실마리를 따라잡을 수 있다. 이를테면 저자는 기존 남성 중심주의의 근대과학을 '나쁜 과학'이라고 단언한다. "나쁜 과학을 폭로하고, 모든 과학의 허구적 성격을 증명하며,진실된 사실을 제안한다"(1백39쪽)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기존의 자연과학은 '고정된 당연한 것'이어서 받아들일 필요가 결코 없다.

해러웨이는 자연의 리얼리티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말한다. 자연이란 그 사회와 시대의 문화적 요구에 따라 '구성되는 산물'이라는 단언이 내려진다. 따라서 여성을 부엌으로 내몰아온 생물학과 자연과학에 '나쁜 과학'이란 딱지가 붙는다. "영장류에게 월경 주기가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암컷의 수동적 성격을 주장하거나, 수컷의 지배를 합리화한 주장은 성차별의 원리로 이용되기 때문"(4백24쪽, 옮긴이의 말)이다.

제8장 사이보그 선언문은 이 맥락에서 울려퍼진다. 사이보그야말로 기존 현실세계의 인종구분과 성차(性差)의 경계를 뛰어넘는 범인류적인 보편성을 지닌 희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해러웨이의 사이보그 인류학은 그 때문에 초급진적인 미래 전망의 격류를 타게 된다.

미래의 사이보그는 특정한 누구를 소외시키지 않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성의 구별없는 사회'의 근간이 된다는 강조다. 물론 이미 고전이 된 이 책의 주장은 논란의 여지를 안고 있다. 그의 사이보그 인류학이란 것이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과학기술 진보에 대한 순진한 찬양이 아닌가 하는 궁금증부터 든다. 너무 급진적이라서 사이보그 인류학의 구체적인 리얼리티가 잘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도 지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론은 가설 내지 이론의 차원을 넘어섰다는 점이다. 인문학은 물론 영화·현대미술 등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를 포함해 '토탈 리콜' '블레이드 러너'등 할리우드 영화도 상당수다. 김민수 전 서울대 교수가 『멀티미디어 인간 이상은 이렇게 말했다』 (생각의 나무,2000)에서 한 말이야말로 사이보그론에 대한 균형잡힌 상식적 이해로 썩 훌륭할 듯싶다. "사이보그 세계는 동물과 기계의 친족관계를 즐기는,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자연적인 세계다. 옳고 그르냐를 일단 떠나 엄청난 인식론적 계획이라는 점의 발견이 중요하다. 사이보그론은 무엇보다 정치적 어젠다에 속한다."(60쪽 요약)

사이보그론은 지난 5월 '사이보그' 등을 출품한 여성작가 이불전시회(로댕갤러리)에서도 정면으로 취급됐다. 한국의 간판작가 이불(38)의 전시회는 한마디로 '사이보그 선언'그 자체였다. 합성수지로 제작한 팔등신 여성 신체를 절단시킨 아름답고도 섬뜩한 이미지의 사이보그를 선보인 것이다. 이런 급진적 이미지를 통해 이 작가가 기존 모더니즘의 현실을 뒤집으려 했다면, 그것은 해러웨이의 전략과 정확하게 닮은꼴이다. 탈(脫)근대문명의 지금 기성 자연과학의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려는 새로운 정치선언이 학문과 예술 영역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성큼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조우석 기자

'사이보그 인류학'이란 낯선 학문의 대모(代母)인 도나 해러웨이(미 캘리포니아대 교수)의 『유인원, 사이보그 그리고 여자』(원제 Simians,Cyborgs and Women)는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이다. 모두 10개의 에세이를 모아놓은 이 책의 압권은 그 유명한 '사이보그 선언문'. 기계와 인간 사이의 잡종인 사이보그야말로 생명과 기계,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를 없애버린 장밋빛 미래의 이미지라는 찬양의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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