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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화의 첫걸음, ‘광무 신문지법’ 공포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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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21년 서울 용산 철도운동장의 취재기자석. ‘신문지법’을 근거로 한 일제의 신문 검열은 기자들에게는 치명적인 ‘자기 검열’로 이어졌다. 총독 정치를 정면에서 비판하는 기사를 써 봐야 신문에 실리지도 못하고 경찰서 구경만 해야 되는 상황에서 당시기자들은 변죽을 울리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출처:사진으로 보는 한국백년]

1907년 7월 20일, 일제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 양위시켰다. 그 나흘 뒤인 7월 24일에는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서명한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이 체결됐고, 같은 날 광무 11년도 대한제국 법률 제1호로 ‘신문지법’이 공포됐다.

“제1조 신문지를 발행하려는 자는 발행지를 관할하는 경찰서를 경유하여 내부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10조 신문지는 매회 발행에 앞서 먼저 내부 및 그 관할 관청에 각 2부를 납부해야 한다. 제11조 황실의 존엄을 모독하거나 국헌을 문란케 하거나 또는 국제 교의를 저해하는 사항은 기재할 수 없다. 제12조 기밀에 관한 관청의 문서 및 의사(議事)는 해당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는 그 상략(詳略)을 불구하고 기재할 수 없다. 특수한 사항에 관해 해당 관청에서 기재를 금할 때도 같다. 제21조 내부대신은 신문지로써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풍속을 괴란(壞亂)케 한다고 인정될 때는 그 발매 반포를 금지하고 이를 압수하여 그 발행을 정지 또는 금지할 수 있다.”

일제는 이 법률을 근거로 비판적인 기사를 사전 삭제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을 폐간할 수 있었다. 사흘 뒤에는 다시 법률 제2호로 ‘정치적 성격을 띤 집회와 결사의 금지’를 골자로 한 ‘보안법’을 공포했다. 법령의 공포 순서는 일제 침략 정책의 우선순위를 보여 준다. 일제는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데 집회 결사의 금지보다 언론 통제가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신문지법’은 일제 강점기에도 민족 언론을 탄압·말살하는 기본 도구였다.

헌법도 없던 전제군주제 시절에, 더구나 일제가 한국 침략을 위해 제정한 이 악법은 해방 후 자유민주주의 헌법이 제정된 뒤에도 오랫동안 존속했다. 1948년 5월 21일, 미군정기의 대법원은 광무 신문지법이 유효하다는 판례를 남겼다. 두 달 뒤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제13조도 ‘모든 국민은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 받지 아니한다’고 하여 이 법률이 ‘위헌 혐의’를 어렵사리 비켜 갈 수 있게 해 줬다. 1948년 11월 1일, 언론 3단체(기자협회·언론협회·담수회)가 신문지법 철폐 성명을 내는 등 이 법에 반대하는 운동이 속발했지만 정부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 법은 야당이 국회 다수당이 된 1952년 3월 19일에야 폐지됐다.

언로(言路)를 통제해야 사람들을 다스리기 쉽다는 것은 유사 이래 모든 권력자가 공지(共知)하는 바였다. 그러나 억지춘향 격의 밀월(蜜月)은 해피엔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전우용 서울대병원 병원역사문화센터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