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업계 사활 건 승부] 고급화로 "재깍재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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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8면

지난달 30일 경기도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는 오리엔트 본사. 연건평 5천여평에 달하는 3층 건물 내부에 드문 드문 빈 공간이 보였다. 공정별로 나뉜 작업실에서는 생산직 직원들이 환한 형광등 불빛 밑에서 일하느라 여념이 없었지만, 널찍한 공간 때문인지 한적한 느낌마저 들었다. 직원 예닐곱명이 마지막 조립 및 검사를 하는 최종 조립라인실은 작업대의 반 이상이 비어 있었다.

"국내 시계산업이 전성기를 맞았던 1980년대 중반만 해도 이 공장에서 1천5백여명이 북적댔지요. 그러던 공장이 지금은 생산직·업무직 다 합쳐 2백70여명밖에 안되니 한적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요."

20년째 오리엔트에서 일해왔다는 정연태 개발팀장의 말에서 한국 시계업계의 어제와 오늘이 단적으로 보이는 듯했다. 정 팀장은 "1993년 원가절감을 위해 중국 칭다오(靑島)공장으로 대부분의 시설을 옮기고 성남 본사에는 기획·디자인·설계·금형 등 핵심 기능만 남아 있다"고 말했다.

59년 설립돼 65년 최초로 국산 손목시계 개발에 성공하는 등 한국 시계산업의 대명사 역할을 해왔던 오리엔트. 80년대 초반 9백억원대의 매출을 올리며 국내 손목시계 시장의 60% 가까이를 점할 정도였던 이 업체가 위기에 빠진 것은 90년대 들어서면서였다.

정부의 수입자유화 조치로 인해 외제품이 물밀듯이 밀려온 데다 대기업이 신규 참여하면서 공급 과잉 및 덤핑 사태가 빚어졌기 때문이다.

중국·홍콩에서 건너온 저가품과 스위스·일본에서 들어온 고가품 사이에서 국내 시계업체는 점점 입지를 뺏겼다. 시계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80년대초 90%에 달하던 국산품의 내수시장 점유율이 최근엔 60% 정도로 떨어졌다"고 말했다. 3천억원 가량의 내수시장에 2백개 정도의 크고 작은 업체가 난립한 것도 시계산업이 불황을 면치 못하는 한 원인이다.

이같은 역경 속에서 국내 시계업체는 제품 고급화와 수출에서 살 길을 찾고 있다. 좁은 국내 시장에서 부가가치가 낮은 저가 제품으로 승부해봤자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서다.

오리엔트는 96년부터 자사의 대표 브랜드인 '갤럭시'아래 '미쏠로지''세피노''히메루스' 등 고급 테마 브랜드를 잇따라 시장에 내놓고 있다. 초경(超硬)텅스텐·사파이어 크리스탈·다이아몬드 등 값비싼 소재를 이용한 이 브랜드들은 최고 1백95만원이나 되는 높은 가격에도 불구하고 시장에서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오리엔트의 백형준 마케팅 팀장은 "전문 취급점을 두는 등 브랜드 관리 전략이 주효하면서 이들 고가제품이 한달에 2천5백여개씩 팔리고 있다"고 말했다.

오리엔트와 함께 국내 시계산업의 쌍두마차를 이루는 로만손은 88년 설립 때부터 아예 고급화 전략을 표방했다. 지난해 9월에는 18K금과 다이아몬드를 소재로 사용한 2백만~1천만원대의 초고가 브랜드 '매리골드'를 출시해 지금까지 80여개를 팔았다. 이 회사 유필열 마케팅팀장은 "많은 판매량은 아니지만 국산 명품 브랜드의 가능성을 확인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수출에도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오리엔트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에서 탈피해 자체 고급 상표로 1천만달러 수출을 달성할 계획이다. 로만손도 지난해 총매출의 70%나 되는 2천1백만달러를 러시아와 서남아 등으로의 수출에서 올렸다.

성남=이현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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