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f&] ‘필드의 홍반장’ 투어 밴, 그 안에선 무슨 일이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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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7면

문승진 기자

움직이는 클럽 병원

투어스테이지에서 투어밴 운영을 담당하고 있는 한승철 팀장이 의사 가운을 입은 채 드라이버 헤드에 청진기를 대고 환하게 웃고 있다. 한 팀장은 투어밴은 선수들에게는 클럽 응급실이며 이곳에서만큼은 자신이 의사라고 말한다. [KLPGA 제공]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총이다. 마찬가지로 프로 대회에 출전하는 골프 선수들에게 무기와 다름없는 것이 바로 클럽이다. 골프는 예민한 스포츠여서 선수들은 클럽 헤드 무게가 1g만 바뀌어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13년 동안 클럽 피팅을 담당해온 투어스테이지의 한승철(36) 팀장은 투어 밴 안에서만큼은 자신이 의사라고 강조한다. 클럽의 점검·수리 및 처방 등을 모두 담당하기 때문이다. 한 팀장은 “5년 전만해도 일반인은 물론 프로골퍼들조차 투어 밴이 뭐하는 곳인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투어 밴에서 클럽을 피팅하고, 고치고 다양한 정보까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선수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됐다. 선수들에게는 응급실이자 사랑방과도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선수들이 가장 신경을 쓰는 것은 ▶클럽의 라이각 점검 ▶샤프트 교체 ▶헤드의 무게 조절 ▶그립 교체 등이다. 선수들의 경우 연습량이 많기 때문에 아이언 클럽의 각도나 로프트가 조금씩 변하기도 한다. 따라서 대회마다 선수들은 라이각을 체크한다. 또한 코스 상태에 따라 웨지의 바운스 부분을 그라인더로 깎아내기도 한다. 라운드가 많은 일반 골퍼들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아이언의 라이각, 로프트 등을 점검하는 것이 좋다고 한 팀장은 귀띔했다.

피팅은 주로 선수들과의 상담을 통해 이뤄진다. 하지만 투어 밴 직원이 직접 연습장에서 선수들의 샷을 지켜본 뒤 피팅을 해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갑자기 심하게 드로나 페이드가 걸릴 경우 샤프트를 바꾸거나 클럽 페이스 각도를 조절하는 등의 응급 피팅을 하기도 한다.

한 팀장은 “라운드 도중 퍼터의 헤드가 빠져 9홀을 마치고 급히 수리해 준 적도 있다. 어떤 선수는 아이언 클럽의 로프트와 라이각이 모두 바뀐 줄도 모르고 사용하기에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부리나케 수리해 준 적도 있다”고 말했다.

현재 국내에서 투어 밴을 운영하고 있는 업체는 투어스테이지, 캘러웨이, 테일러메이드, 타이틀리스트, 클리블랜드 등 5개 업체. 소속 선수들의 클럽 피팅은 모두 무료다. 다른 브랜드의 클럽을 사용하는 선수들에게도 간단한 수리 등은 무료로 해준다. 2007년에는 투어 밴에서 일하는 사람들끼리 모임(투어랩)을 만들어 정보를 교류하고 간단한 부품은 서로 공유하고 있다.

클럽에 대한 믿음이 매우 중요

클럽 피팅과 관련된 장비가 갖춰진 투어 밴 내부.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라는 것이 있다. 의사가 약효가 전혀 없는 가짜 약을 처방했는데도 환자들은 막연히 좋아질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고, 그 결과 병이 낫는 현상이다. 프로의 세계에서도 플라시보 효과가 존재한다. 선수들이 투어 밴을 찾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경기 출전을 앞두고 심리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서다. 피팅을 통해 선수들은 가장 중요한 클럽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한 팀장은 “어떤 선수가 볼이 잘 맞지 않는다며 클럽 피팅을 의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바쁘다 보니 피팅하는 것을 깜빡 잊었다. 다음 날 아무것도 모르고 클럽을 들고 나간 선수는 경기가 끝난 뒤 ‘형, 오늘 볼이 너무 잘 맞아. 피팅 잘해줘서 너무 고마워’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프로에게 클럽에 대한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클럽 피팅에 예민한 골퍼들도 많다. 어떤 선수의 경우 1년에 드라이버를 16개나 만들어 간 적이 있다. 한 대회에서 드라이버를 5개나 바꿔 들고 나간 선수도 있다. “라이각을 0.2도만 세워달라, 샤프트 길이를 2㎜만 잘라 달라, 클럽 헤드 무게를 1g만 늘려 달라”는 등의 까다로운 주문을 하기도 한다.

골퍼들의 주문이 다양하다 보니 투어 밴에서 아예 새 클럽을 제작하기도 한다. 한 팀장은 “드라이버를 가장 빨리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7분이다. 소속 선수들의 경우 기본 데이터와 어떤 사양을 선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클럽 피팅에 대한 전문 지식과 관심은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많은 편이다. 여자 골퍼들의 경우 클럽의 성능이나 기능보다는 비주얼과 디자인을 중시하는 편이다. 한 팀장은 “투어 밴은 병원과도 같은 곳이다. 어디가 아픈지, 어디가 이상 있는지 말해야 의사가 정확한 진단과 처방을 내릴 수 있다. 클럽의 어디가 이상이 있는지 말도 안 하면서 무조건 잘 맞게 해달라고 주문하는 선수들도 있다”며 “클럽에 대한 기초 정보나 간단한 지식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 경기력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기름 먹는 하마, 차 값만 수억원대

투어 밴

투어 밴이 국내에 등장한 것은 2001년. 당시엔 소형 버스를 개조해서 만들었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정식 투어 밴이 등장한 것은 2006년이다. 투어 밴은 9.5t 대형 트럭을 개조한 것이다. 차 값만 8000만원 정도. 여기에 각종 기계를 설치하고 인테리어를 하는 데 드는 비용이 2억6000만원 정도 든다. 차 값만 3억원이 훌쩍 넘는다. 유지비도 많이 든다. 보통 200L(경유)씩 주유하는데 1L당 연비가 3~5㎞밖에 안 된다. 여기에 에어컨을 포함해 각종 기계에 들어가는 전기 소모량도 많아 별도 자체 발전기를 장착하고 있다. 지방에서 열리는 대회에 한번 갔다오는 데 기름값만 수백만 원이 든다. 제주도에서 대회가 열리면 배로 투어 밴을 실어 날라야 한다.

투어 밴은 보통 대회가 열리기 3~4일 전에 골프장에 도착한다. 골프장에 도착하면 투어 밴은 변신을 시작한다. 평상시 길이 11m, 폭 2.8m이었던 투어 밴이 길이 12.5m, 폭 4m로 바뀐다. 계단과 출입문은 물론 베란다까지 생겨난다. 트럭에서 클럽 병원으로 탈바꿈하는 셈이다.

내부에는 로프트와 라이각을 조정하기 위한 앵글 머신, 아이언 클럽의 바운스를 깎아 주는 그라인더 등 피팅과 관련된 모든 장비가 완비돼 있다. 클럽을 새롭게 만들 수 있도록 클럽헤드, 샤프트, 그립 등도 준비돼 있다. 선수들에게 지원하는 볼·신발·장갑·모자·우비 등도 항상 가지고 다닌다.

투어 밴은 대회가 시작되면 철수를 준비한다. 주차공간이 부족한데다 막상 대회가 시작하면 클럽을 고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투어스테이지는 2001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24인승 대형 버스를 개조한 토너먼트 서비스 카를 운영했다. 처음에는 선수들은 물론 골퍼들에게도 생소한 차량이었다.

한승철 팀장의 말.

“도입 초기에는 투어 밴에 와서 커피를 주문하는 분들도 많았다. 어떤 아주머니는 우는 아이 손을 잡고 와서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기도 했다. 선수들도 눈치만 살피고 그냥 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선수들에게 꼭 필요한 차량이 됐다. 내가 피팅한 클럽으로 우승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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