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 파워 소프트 코리아] 3. 변호사 등 고급인력 영화산업에 몰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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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연수원을 마치고 영화사 싸이더스 법무실장으로 간다고 했더니 다들 왜 어렵게 공부해서 고작 '딴따라'냐고 말리더라고요."

서울대 법대 출신 변호사인 시네마서비스 박영목 상무는 2000년 선배 변호사의 권유로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로 싸이더스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법률사무소에 들어간 또래 변호사에 비해 버는 돈은 적었지만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매력에 끌렸다. CJ엔터테인먼트에 지난해 9월 입사한 캐나다 교포 출신 변호사 이유민 과장도 같은 사례다. 캐나다의 한 소프트웨어 회사 소속 변호사로 근무할 때보다 연봉이 3분의 2 수준으로 줄었지만 과감히 직장을 옮겼다. 웬만한 규모의 국내 영화사엔 유학파는 물론 변호사나 명문대 MBA(경영학 석사)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다. 변호사로 미국 버티고 엔터테인먼트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로이 리는 "미국에서도 20~30년 전까지는 엔터테인먼트를 제대로 된 산업으로 치지 않았지만 대중의 인식이 바뀌면서 유능한 인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한국 영화산업이 성장했다고는 하나 전 세계 영화시장(713억달러)의 절반을 차지하는 미국 영화산업에 비하면 여전히 구멍가게 수준이다. 게다가 최근엔 파이가 커질 만큼 커졌다는 비관론도 나온다. 그런데도 왜 고급인력의 유입이 계속될까.

시네마서비스 박영목 상무는 "한국영화 위기론이 나올수록 고급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국내 시장이 포화상태인 만큼 해외로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CJ엔터테인먼트 해외팀 이유민 과장)에서 기존의 개인적인 네트워크만으로는 해외시장에서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에버그린은 엔터테인먼트를 전문 분야로 삼기 위해 준비 중이다. 투자회사를 세워 '나인 디렉터스'에 우회 투자하는 형식으로 이미 영화산업에 발을 담갔다. 에버그린의 전상민 변호사는 "미국의 큰 스튜디오들이 지금은 한국영화 리메이크 판권 구입 정도에 머물러 있지만 앞으로 감독 등 제작자와의 직접 접촉이 많아지면 우리 법률사무소가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계는 1990년대 중반 삼성과 대우 등 대기업이 영화판에 뛰어들면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97년 외환위기 후 대기업이 모두 발을 뺐지만 고급인력은 남아 영화판 '근대화'에 기여했다. 지금도 영화와 방송계에는 삼성영상사업단.대우영상사업단 출신이 많다.

삼성영상사업단 출신인 롯데시네마 최건용 이사의 회고. "삼성이 비디오 시장에 처음 뛰어든 80년대 후반엔 지방 업자들에게 비디오 판권을 미리 팔아 그 돈으로 영화를 만드는 게 관행이었을 만큼 영화시장이 낙후돼 있었다. 이런 메커니즘을 모르니 처음엔 대기업들도 번번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기업이 앞장서 판권 보증보험을 도입하는 등 변화를 꾀했고 덕분에 충무로에 거짓말이 줄었다."

당시 대기업이 젊은 영화인들에게 투자한 것도 영화판 세대교체를 부추겼다. 우노필름의 차승재 대표(현 싸이더스 픽쳐스)의 데뷔작격인 '돈을 갖고 튀어라'등이 삼성의 돈으로 찍었다. 노장 감독 밑에서 연출부만 10년씩 해야 겨우 데뷔할 수 있었던 과거와 달리 젊은 기획자들의 역할이 커지면서 신인 감독 데뷔도 쉬워졌다. CJ엔터테인먼트 해외팀 박이범 팀장은 "한국영화계가 과거의 도제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면 충무로에 연고가 없는 유학파 출신 곽경택 감독의 '친구'는 나오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끊임없는 '젊은 피'수혈도 큰 몫을 했다. 4년제 대학의 영화 관련학과 졸업생은 98년 233명에서 2002년 573명으로 두 배 이상 늘었다. 애니메이션.만화 관련 정규교육기관 역시 97년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분야의 2002년 배출인력은 98년의 7배나 된다. 반면 대중음악 관련 졸업자는 감소세다.

95년 개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역할도 크다. 박찬훈 영상원 행정실장은 "99년 31명을 시작으로 2004년까지 졸업생 230명을 배출한 영상원의 졸업생 중 59.1%가 영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한다.

특별취재팀

노재현 문화부장(팀장), 이세정 경제부 차장, 유상철 국제부 차장, 안혜리.정현목.김준술.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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