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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둥빈둥 노총각 외로움은 끝 휴 그랜트 '아빠만들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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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초등학교 노래 자랑대회. 바가지 머리의 꼬마가 30년 전의 히트곡을 노래한다. 변변한 반주도 없이 로버타 플랙의 히트곡 '킬링 미 소프틀리 위드 히즈 송(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을 맥없이 부른다. 쏟아지는 아이들의 야유. 우리나라에 빗대면 앳된 소년이 인기 그룹 god나 쿨 대신 조용필이나 심수봉의 선율을 흥얼댄 것이다.

그때 '흑기사'가 나타난다. 별로 잘 치지도 못하는 기타를 들고 나와 아이와 함께 '킬링 미 소프틀리'를 부른다. 공연장은 웃음바다가 된다. 그래도 두 가수는 멈추지 않는다. 객석의 반응과 관계없이 자신있게 노래를 끝마친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About a Boy)'의 마지막 부분이다. 포복절도하는 웃음 속에 진한 감동이 스친다. 노래 실력은 밑바닥이나 그들이 전하는 우정과 사랑은 메가톤급이다. 고급 코미디의 파워를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어바웃 어 보이'는 원자처럼 흩어져 사는 오늘날 가족에 대한 생생한 리포트다. 단절된 가족을 봉합하려는 영화의 의도는 쉽게 간파되나 그렇다고 할리우드처럼 멋진 해피엔딩으로 마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화는 흥미롭다. 그리고 유쾌하다. 재치있고 간결한 대사, 바로 옆에 있는 것 같은 캐릭터, 엉뚱한 듯 말이 통하는 에피소드로 훈훈한 드라마를 완성했다.

할리우드 10대 섹스 코미디의 대명사인 '아메리칸 파이'의 폴·크리스 웨이츠 형제 감독이 영국으로 건너가 한단계 업그레이드한 모양새가 돋보이는 이 영화는 '아메리칸 파이'의 위트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분위기를 더해 감칠맛 나는 코미디가 됐다.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은 외롭다. 그럼에도 그 외로움의 뿌리를 모른다. 아버지가 남겨준 크리스마스 캐럴 히트곡에서 나오는 인세로 평생을 빈둥거리며 사는 윌(휴 그랜트)이 전형적 인물이다. 직장이든 이성이든, 두 달 이상을 견디지 못하는 윌의 관심사는 오직 단기간의 섹스일 뿐, 타인과의 교감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인간은 모두 고립된 섬"이라는 게 그의 철학이다.

영화의 기둥은 아기를 사탄으로 생각하는 윌과 미울 만큼 조숙한 꼬마 마커스(니컬러스 홀트)의 교류기다. 우울증에 걸려 시도 때도 없이 훌쩍대는 엄마(토니 콜레트)와 함께 사는 마커스가 "둘은 외롭다. 적어도 셋은 있어야 한다"는 점을 불현듯 생각하고, 윌과 엄마를 강제로 연결시키려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따뜻한 해프닝이 중심축이다.

'어바웃 어 보이'의 매력은 가벼우면서도 경박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루를 시계처럼 나누어 사는 윌과 촌스런 복장과 취향으로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하는 마커스가 서로를 하나하나 알아가며 하나로 뭉쳐가는 과정이 햇사과를 씹는 것처럼 상큼하다. "인간은 섬이되 바다 밑에선 하나로 연결됐다"고 깨닫는 윌의 각성이 억지스럽지 않고, 사랑과 희생이란 온정적 가족주의를 벗어던진 기조도 할리우드 영화와 차별화된다. 23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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