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는 악령이 보이는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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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홍콩산 공포영화 '디 아이(The Eye)'의 원제는 '견귀(見鬼)'다. 귀신을 본다는 뜻의 제목에서부터 영화의 주요 모티브를 읽을 수 있다. 두살 때 시력을 잃은 여인 문(안젤리카 리)은 안구 이식 수술을 받은 뒤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환영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원령들이 그녀에게만 나타나는 것. 누군가 자신에게 메시지가 담긴 '전파'를 발신하고 있다고 생각한 문은 결국 안구 기증자를 찾아나선다.

공포영화의 문법으로 보자면 '디 아이'는 동양식과 서양식이 혼합된 '섞어찌개'에 비유할 수 있다.

남다른 예지 능력을 지녀 대규모 참사를 경고하지만 오히려 마녀로 몰린 끝에 자살한 소녀의 한을 풀어준다는 기본 뼈대는 '전설의 고향'등에서 익숙한 동양식 정서다.

반면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혼령이 자신에게만 출몰한다는 설정이나 원혼과 교감한 주인공이 대형 재난을 예방하려 애쓰지만 무위로 그친다는 결말은 아주 최근의 예를 보더라도 '식스 센스''모스맨' 등의 할리우드 심령 스릴러물과 상당 부분 닮았음이 분명하다.

'디 아이'에 대한 평가는 이 지점에서 갈라진다. 영화를 좀 봤다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소재들의 짜깁기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짬뽕'의 혐의를 능숙하게 피해나가는 것도 사실이다. '본다'라는 행위가 비록 맹인에게라도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될 수 있다는 가치의 전복은 이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것 같은' 이야기에 신선한 피를 공급한다. 살풀이가 끝나면 평화로운 일상으로 복귀하는 공포영화의 전형적인 결말을 피하고 작은 충격을 준비한 점 역시 이 영화에 배어 있는 독특한 향취다.

안구 이식 후 귀신이 보인다는 아이디어에 구미가 당겨 영화를 택했던 사람이라도 혹 속도감 있는 전개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이 영화의 맛은 서서히 긴장감을 쌓아가는 공포의 축조술을 즐기는 데 있다.

'디 아이'는 지난 5월 홍콩에서 개봉돼 '스타워즈 에피소드2-클론의 습격''스파이더 맨' 등 쟁쟁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따돌리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최근 10년간 홍콩 박스오피스를 통틀어 최단기간(13일)에 1천만 홍콩달러(약 16억원)의 흥행 수익을 올렸다. '첨밀밀'의 감독 천커신(陳可辛)이 제작했다.

원래 '파이란'의 여배우 장바이츠(張柏芝)에게 주인공 문의 역할이 갔지만 대본을 읽은 그녀가 너무 무섭다며 출연을 포기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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