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3가역 벽화에 '문화 테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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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공공 벽화나 환경 조형물 등 문화 예술품을 파괴하는 '반달리즘'이 서울 지하철 역사에서 처음 일어났다.

지난달 26일 오후, 지하철 을지로3가역 환승 통로에 설치돼 있던 이동기·강영민씨의 벽화 '서브웨이 코믹 스트립' 위에 누군가가 검정 스프레이로 50m쯤 되는 선을 죽 그어놓고 "다시 그려요!"라고 써넣어 작품을 못쓰게 만들었다. 사건 이 일어난 뒤, 현장 조사와 사진 촬영 등 보고서를 작성한 서울지하철공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달려간 화가 강영민(31)씨는 망가진 작품을 확인하고 난 뒤 자신의 홈페이지(http://youngmean.com)에 참담한 마음으로 글 한 편을 올렸다.

"검정 스프레이 '테러'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사료되지만…일단 의도적으로 방치해두면서 여론을 수렴해보면 어떨까 합니다…세금으로 제작된 공공자산을 훼손한 데 대해선 책임을 져야겠지요."

검정 스프레이 세례를 받은 '서브웨이 코믹 스트립'은 2000년 9월, 서울시가 주최한 '미디어시티 서울 2000'전의 한 부문이었던 '서브웨이 프로젝트'에 출품됐던 벽화다. 제목 그대로 재미있고 익살스러운 이미지와 인물들이 늘어서 보행자들 눈길을 잡아끌었고, 축제 기간 중 이용 승객들의 호응을 얻었던 이 두 작품은 을지로 3가역에 영구 설치로 기증됐다.

사건의 발단은 다소 파격적인 작품 내용에 있었다. 미국과 일본과 미국의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인 아톰과 미키마우스를 합성한 이동기씨의 아토마우스나, 기괴한 표정과 행동이 꽤 튀어 보이는 강영민씨의 사람 그림은 지난 2년 동안 서울지하철공사 '고객의 소리' 게시판에 단골 소재로 오르내렸다. "지나갈 때마다 기분 나쁘고 역겹다" "뜻도 알 수 없는 그런 그림들이 혐오스럽다" "보는 사람들마다 눈이 휘둥그레지더라" 등 "편안하고 산뜻한 분위기로 바꿀 수 없느냐"는 내용이 접수됐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두고 직접 이 역을 지나다니는 승객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예술을 전공한 사람이라고 밝힌 한 승객은 "벽화를 보고 참 참신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런 일이 생겨 무척 아쉽다"며 "모두들 취향이 다르겠지만 설령 마음에 안 들더라도 공공기물, 더구나 예술품을 부수는 폭력을 쓴 사람이라면 문화의식을 의심하게 된다"고 작품의 원상복귀를 바랐다. 이 일을 바라보는 미술인들 심정은 착잡하다. 공공미술 전문 기획자인 박삼철('아트컨설팅 서울' 소장)씨는 "예쁘장한 그림만 원하는 시민들 앞에서 작가들의 사회에 대한 고민이나 미학적 실험이 설 자리가 없다"며 "정치적 신념을 위해 반달리즘을 쓰는 외국과 달리 그런 토대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예술작품을 망가뜨리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미술계에서는 앞으로도 이런 반달리즘이 또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다.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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