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덕수궁의 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덕수궁의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본래 왕궁이 아니라 조선시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으나 임진왜란 후 피란길에서 돌아온 선조가 불타버린 궁궐 대신 머물면서 왕궁이 됐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7년간 이곳에서 살다가 1611년 창덕궁으로 옮겨가면서 붙여진 이름이 '경운궁'이었다.

구한말 고종이 즉위하면서 덕수궁이 있는 정동 일대는 정치·외교·종교·교육의 중심지로 변했다. 이 때부터 조선과 교류를 원하는 서구 열강의 외교 시설이 정동으로 들어오기 시작, 미국·러시아·독일·이탈리아·영국·프랑스 등 외국 공사관 건물이 25개나 들어섰다.

이처럼 외교단지로 변모하는 가운데서도 대한제국 황실은 경운궁으로부터 5백m 이내 지역에 대해서는 개발을 억제하고 건축물 높이를 제한해 눈길을 끈다. 외국 공관이 높아 궁궐을 내려다 보는 일이 없도록 한 것이다.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강제 퇴위하면서 고종이 거처로 삼았던 경운궁도 유린되기 시작했다. 일제는 궁궐 호칭을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덕수'는 조선초 태조가 정종에게 왕위를 내주고 물러난 뒤 받은 호칭이었다. 일제가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내준 고종을 조롱하는 뜻이 담겨 있다.

이후 1910년대 일제는 덕수궁 주변에 돌담길을 만들며 본격 훼손에 나섰다. 궁궐터에 도로와 학교, 민가가 들어서면서 궁궐의 규모는 3분의 1로 축소됐다. 또 1930년대에는 덕수궁을 '중앙공원'으로 유원지화하고 벚나무를 심는가 하면 석조전을 일본 고관들의 여관으로 사용했다. 미국 대사관은 1984년 덕수궁 내 선원전터인 경기여고 부지를 매입했다. 목원대 김정동(건축학)교수는 "왜소한 규모가 된 덕수궁은 열강에 휘둘렸던 우리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상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