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층분석 집단소송제] 下. 공시 잘 못하면 큰 일 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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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집단소송은 공시와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부자거래와 주가조작을 빼고는 집단소송의 대상이 모두 공시와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 상장.등록기업의 공시에 대한 인식은 과거에 비해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지금까지는 공시를 한 두 번 잘못 해도 큰 문제가 없었지만 앞으론 달라진다. 집단소송을 당할 경우 공시 한 번 잘못으로 회사의 운명이 바뀔 수도 있다.

◆집단소송 대상은=소송 대상이 되는 불법 행위는 ▶유가증권신고서.설명서 허위.부실 기재 ▶정기보고서(사업보고서.분기 및 반기보고서) 허위.부실 기재(분식회계 포함) ▶내부자거래 및 주가조작 ▶회계법인의 부실감사(분식회계 포함) 등이다.

지난해 씨티은행의 한미은행 주식 공개매수나 합병 등으로 인한 피해는 집단소송 대상이 아니다. 각종 현안이 있을 때마다 즉시 해야 하는 수시공시도 집단소송 대상에서 빠졌다. 수시공시는 나중에 정정되는 사례가 많은데 이를 모조리 집단소송 대상에 포함시킬 경우 소송이 남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유가증권신고서와 설명서는 유상증자나 채권 발행 때 내는 서류다. 상대적으로 내는 빈도도 적고 허위.부실로 기재할 내용도 많지 않다.

문제는 정기보고서다. 반기.분기보고서는 해당 기말 이후 45일 이내에, 사업보고서는 결산일 이후 90일 이내에 반드시 내야 한다. 당장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등록기업이 올 3월 초에 낼 정기보고서가 집단소송 대상이 된다. 내부자거래나 주가조작은 해당기업이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면 기업은 소송 대상이 되지 않는다.

◆허술한 기업의 공시=올해부터 집단소송 대상이 되는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등록기업이 2000년~2004년 10월 사이 한 정기공시는 1282건이었다.

이 가운데 24.6%인 316건이 나중에 정정됐다. 정기공시 4건 중 1건은 엉터리였다는 얘기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등록기업 중 허위 공시로 제재를 받은 기업도 18개나 됐다. 이런 사례가 올해 이후 나온다면 상당수가 집단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게 금융감독원의 분석이다.

소송대상 가운데선 정기보고서가 소송의 표적이 될 공산이 크다. 빈도도 높고 내용도 기업활동 전체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사례를 봐도 사업보고서의 허위.부실기재가 가장 많았다.

자산 2조원 이상 상장.등록기업이 2000년~2004년 10월 공시위반으로 처벌 받은 69건 가운데 사업보고서 허위.부실기재가 48건으로 70%에 달했다. 사업보고서 관련 공시 위반 중 42건은 분식회계였고 6건은 재무와 관련없는 사항이었다.

재무와 무관한 사업보고서 허위 기재로는 대주주와의 자금거래를 표시하지 않은 게 5건으로 가장 많았다. 금감원 관계자는 "상당수 기업이 아직도 대주주 관련 사항에 대해선 소극적으로 공시하거나 아예 감추는 경향이 있다"며 "앞으로는 이런 허위 공시가 적발되면 주가가 떨어져 집단소송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개선방안 마련 시급=금감원도 집단소송을 대비해 공시제도를 많이 손질했다. 사소하고 경미한 오류에 대해서는 집단소송을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다. 기업의 공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기밀사항 등은 올해부터 공시대상에서 빼주기로 했다.

이를 위해 유가증권 발행.공시 규정을 바꿨다. 이에 해당되는 기업기밀은 제조원가명세서.예금.유가증권.재고자산.주요 채권.단기차입금.주요 채무.장기차입금.사채.감가상각비.법인세명세서 등 11개 항목이다. 수시공시를 통해 이미 공시한 주요 경영사항도 사업보고서에 기재토록 하던 것을 앞으로는 진행사항이나 변경사항이 있는 경우에만 기재토록 개선했다.

그러나 기업들은 정기보고서에 기재해야 할 내용이 여전히 너무 구체적이고 포괄적이라고 지적한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투자계획이나 자본확충 또는 신제품 개발 내용까지 사업보고서에 포함토록 한 것은 지나치다는 것이다. 이런 사항은 나중에 바뀌는 경우가 많은데 이로 인해 주가가 떨어지면 집단소송에 휘말릴 수 있다는 것. 따라서 나중에 정정될 가능성이 큰 사안은 수시공시로 대체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는 게 재계의 요구다.

특별취재팀 = 정경민.김동호.나현철.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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