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95>제102화고쟁이를란제리로:44.수출진흥기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무역협회에서 하는 일은 많았다. 1970년대에는 수출진흥기금을 조성해 운영하는 일을 했고, 90년대에는 그 일로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무역협회는 1969년부터 민간 차원의 수출 지원을 위해 '수출진흥기금'을 만들어 운영했다. '특계자금'이라고도 했다. 수입 금액의 일정 비율을 특수회비(수입부담금) 명목으로 거둬 기금을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이 기금의 조성과 운영을 위한 초대 위원으로 선출됐다. 기금의 쓰임새는 많았다. 홍콩 코리아센터(70년)·뉴욕 한국센터(74년) 매입자금으로 쓰였다. 무역협회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삼성동 6만평 대지 위에 세계적인 콤플렉스를 완성하는 밑거름도 됐다.

우리나라 수출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에 특계자금은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80년대 중반부터 기금 운영을 놓고 논란이 대두됐다.

"수출과 연관도 없는 사업에 왜 수출기금을 쓰는 거요 ?"

국회의원의 외유 등에 사용된 게 문제가 돼 언론에서 시끄러웠다. 특히 특계자금 수백억원을 내외경제 사옥을 짓는 데 쓰려 했던 것이 기억난다. 나를 비롯한 부회장들이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정재석 상공부 장관에게 특계자금 사용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나서야 내외경제 사옥건은 백지로 돌아갔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수출진흥기금은 91년 무역진흥기금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97년 말에는 아예 징수를 중지했다. 28년 동안 징수된 금액이 8천억원에 달했다.

한국무역협회 일을 하면서 나는 많은 사람과 친교를 갖게 되었다. 주로 나이가 많은 선배 기업가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협회 회장을 지낸 나익진(翼鎭)·박용학(朴學) 회장이다. 두 분은 경제계에서 덕망이 있고 무역협회 일에 헌신한 분들로 나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나회장은 15년생으로 나보다 10년 위였다. 85년 상공의 날 모범 상공인으로 나와 함께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90년에 돌아가셨는데, 그후 전경련 유창순(彰順) 회장과 대한상의 김상하(金相廈) 회장에게 건의해 각계의 추천으로 고인에게 금탑산업훈장을 추서케 했다. 그후 나도 모범 상공인으로 92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으니 선배의 뒤를 이은 셈이다.

박용학 회장도 15년생이다. 무역협회에는 늦게 관여해 65년 이사, 70년 부회장, 91년 회장을 맡았다. 회장직을 맡은 그해에 박회장을 단장으로 20여명의 방문단이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부단장을 맡았다.

상하이(上海)로 간 우리는 세계무역센터 이사장의 만찬에 초대됐다. 이때 상하이 푸둥(浦東)에 코리아센터를 세우자는 의견이 나왔다. 건물 지을 땅 3천평을 사기로 합의해 흥정까지 했다. 비용은 홍콩 코리아센터를 팔아 조달하기로 했다. 그러나 상공부에서 홍콩 코리아센터 매각에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지금 생각해도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홍콩 코리아센터는 98년 팔렸으며 99년에는 무역협회 홍콩지부가 없어졌다. 상하이 지부는 올해야 신설됐으나 아직 건물은 없는 상태다.

박용학 회장과는 사업상으로도 인연이 있다. 70년 초 한일은행이 제분공장을 인수할 의향이 있느냐고 제안했다. 알고 보니 박회장의 소유였다.

"제분공장을 정말 처분하실 겁니까 ?"

"은행에서 부채가 많다고 팔라고 하니 어쩌겠습니까."

박회장의 뜻을 확인한 나는 은행측에 인수 의사가 없다고 통보했다.

98년 나는 미도파 백화점 주식 8천6백여주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페레그린 증권회사와 미도파 백화점 간에 대주주가 되기 위한 공방이 치열했다. 회사 임원이 그 상황을 내게 보고하며 주식을 서둘러 처분할 것을 권했다.

"어려운 시기에 나까지 그래서는 안된다."

나는 주식을 팔지 않았다. 결국 그 주식은 모두 휴지가 됐다.

"주거래은행도 다 팔아버렸는데 고맙소."

나중에 그 사실을 안 박회장이 내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정리=이종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