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자가 살맛나는 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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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부존 자원이 없는 우리나라는 첨단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인적 자원에 의존해 미래를 개척해야 한다." "지식기반사회, 무한경쟁의 세상에서는 새로운 지식과 정보로 무장한 인적자원이 국가 경쟁력을 좌우한다."

꼭 과학기술인이 아닐지라도 이런 내용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과학기술이, 아니 과학기술만이 우리에게 더 살 만한 미래를 열어줄 힘이 된다는 것은 이제는 상식이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를 개척할 과학기술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청사진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현재 세계 21위인 과학기술 경쟁력을 2006년까지 10위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2002년부터 5년간 35조원을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마련했다. 이는 지난 5년 동안 투자한 금액의 두배다. 특히 정보기술(IT)·바이오기술(BT)·나노기술(NT) 등 핵심기술에 13조원을 투자할 계획이다.

그러나 과학기술계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다. 무엇보다 이공계 위기론이 수그러들지 않는다. 과학기술에 대한 청소년들의 호기심과 창의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최하위권을 맴돌고 있다. 과학기술자 사기 진작을 위해 다양한 해법이 나오고 있지만 일선의 분위기는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더 혁신적이고 장기적인 해법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젊은 연구자들의 사기는 대학원에 진학한 후 5년간 의무적으로 치러야 하는 병역특례 때문에 현저히 떨어진다. 이를 3년으로 줄일 경우 우수 인력의 이공계 유치와 고급 인력의 확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국방의 의무는 대한민국의 젊은 남성들이 누구나 치러야 하는 신성한 의무지만, 과학기술 인력은 연구를 통해 장기적으로 국부와 국방에 기여한다는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국가 공무원 중 이공계 출신과 인문계 출신의 비율을 장기적으로 50대 50으로 하는 방안도 강구할 만하다. 사법고시 출신의 변호사가 특허를 담당하는 변리사 업무를 겸할 수 있게 한 규정도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

미국의 대학 교수들은 자신들이 수혜한 연구비 중 세달치 봉급에 해당하는 돈을 마음대로 쓸 수 있다. 1980년에 입안된 베이-돌(Bayh-Dole) 법안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의 결과를 대학과 연구자가 특허나 라이선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교수들의 창업이 줄을 이었다. 미국이 생명공학에서 독보적 우위를 점하는 이유도, 하루가 멀다하고 지식이 변하는 분야에서 대학-벤처기업-대기업 사이에 정보·기술·사람의 다이내믹한 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캐나다 대학은 연구자가 수혜한 연구비 중 대학이 가져가는 오버헤드(overhead) 만큼의 돈을 연구자 개인에게도 돌리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일은 남들보다 열심히 하는데 사회적 보상이 그에 따르지 못하고 연구에의 압력만 가중된다면 열정이 지속되기 힘들다.

정부의 정책은 큰 방향을 정해주는데 더 신경써야 한다. 과학기술을 국가경쟁력의 모태로 드라이브하는 것도 좋지만, 혹시 우리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연구가 이러한 드라이브 속에서 매몰되지나 않는지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생명공학이나 정보기술과 같은 분야에서 연구와 기술개발 사이에 시간 간격이 줄어든다고 해 모든 기초 연구를 단기간 내의 응용만 생각해서 지원하는 것은 근시안적이다. 당장 산업화와는 거리가 있더라도 기초연구를 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하고, 상업적인 가능성이 있는 연구는 대학·기업·벤처산업·출연연구소 사이의 상호교류를 촉진하는 쪽으로 정부 지원이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까운 미래의 기술 경쟁력만 생각하다가 그 경쟁력의 토대를 부식시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홍 성 욱

<토론토대 교수·과학기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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