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사고 피해땐 즉각 법적 대응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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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난 23일 서울지법이 지난해 여름 집중호우 때 '가로등 감전사'로 희생당한 사람들의 유족들에 대해 지방자치단체가 7억2천만원의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재판부는 "서초구청은 집중호우로 가로등이 침수돼 누전될 경우 감전사고의 가능성이 있음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담당공무원이 사고 당일 안전조치를 취하지 않은 책임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당시 내린 집중호우로 우리나라에서 모두 19명이 감전사했다고 한다. 과거의 대형사고를 일일이 언급하지 않아도 우리는 안전불감증에서 오는 인명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정말 위험스럽게 살고 있다. 서울시내 곳곳에 세워져 있는 '어제의 교통사고'판을 보자. 사망 ○명, 부상 ○○○명. 이미 우리는 이런 숫자에 무감각하게 살고 있다. 세계 어디에 이런 사고 기록판이 또 있는지 모르겠다.

몇해 전 모 어린이 놀이공원에서 큰 타원으로 돌리는 놀이기구가 갑자기 고장나 타고 있던 어린이들이 1시간여 동안 거꾸로 매달렸다가 구조된 일이 있었다. 당시 보도는 놀이기구 밑단의 나사가 풀려 있었다고 사고 원인을 전했다. 그러나 이 놀이공원의 과실 책임소재와 그에 대한 법적책임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떨던 어린이들과 그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가족들이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피해보상을 해야 한다는 보도는 더 더욱 접하지 못했다.

놀이공원은 놀이기구를 안전히 운영관리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를 소홀히 하면 이런 사고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은 당연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듯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아 상대방에 피해를 주었다면 그 결과에 대해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바로 '과실'(Negligence)의 개념이다.

1992년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 커피소송을 보자. 당시 80세 가량의 할머니가 손자와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맥도널드에서 커피 한잔을 샀다. 손자가 운전을 했는데 할머니는 커피에 설탕과 크림을 넣기 위해 차를 잠시 세웠다. 할머니는 컵을 무릎 사이에 끼우고 뚜껑을 열다가 커피가 허벅지에 쏟아졌다. 할머니는 몸 전체의 6%에 3도 화상을 입었고 8일간 입원, 피부이식수술을 받았다.

할머니는 맥도널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커피를 쏟은 할머니의 잘못이 20%, 뜨거운 커피를 판 맥도널드사의 잘못이 80%라고 판시했다. 맥도널드는 거액의 배상금을 물었다.

재판과정에서 맥도널드사가 어느 음식이든 섭씨 60도 이상이면 화상을 입을 수 있음을 알고도 최고의 커피맛을 내기 위해 커피 온도를 섭씨 82~87도로 맞춰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법원은 이를 맥도널드의 과실이라고 판시한 것이다. 소송 후 커피 온도는 70도로 낮춰졌다. 미국은 이런 류의 소송이 너무 많아 탈이지만, 그만큼 사회 안전에 기여하는 바는 크다. 피해자가 많을 때는 집단소송(class action)도 가능하고, 가해자의 행위가 심한 경우 징벌적 손해 배상(punitive damages)도 받을 수 있다.

'가로등 감전사' 같은 판결은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전하게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된다. 한국 법원의 이번 판결이나 미국 법원의 맥도널드 판결은 모두 사고의 가능성을 예견하고서도 예방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처벌이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피해를 당했을 때 가만있지 말고 자신의 법적권리를 주장할 줄 아는 시민의식이다. 이런 시민의식이 활발히 제 목소리를 낼 때 우리 사회는 그만큼 안전해 질 수 있을 것이다.

법적 제도의 개선도 필요하다. 미국과 같이 전면적인 집단소송제도를 고려해 볼 필요가 있고 징벌적 손해 배상의 도입도 안전 불감증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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