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 사랑의 '큰 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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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통문관(通文館)'은 고려 때 중국에 보내는 문서 등을 살피는 사대(査對) 외교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1934년부터 서울 인사동에서 고서점을 열어온 산기(山氣) 이겸로(李謙魯·93) 옹이 45년 해방을 계기로 가게 이름을 '통문관'으로 바꾼 배경에는 이런 역사적 내력이 스며있다. 문자 그대로 '글이 왔다 갔다 하는 통로'이기도 하면서 국학 분야의 소중한 책과 자료들을 갈무리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작명이다.

이옹이 지난 3월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이 박물관으로 등록한 것을 축하해 한·중·일 서예와 고문헌 자료 2백90건 4백91점을 한목에 기증한 일도 이런 인연에서 출발했다.

반세기 넘게 서첩과 탁본·필사본 등 글씨에 대한 책을 모아오면서 그 호방하고 아름다운 세계와 만나 행복했다는 이옹은 "집대성한 걸 헤쳐 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싶어서 글씨를 공부하는 후학들과 나누고픈 마음에 내놓게 됐다"고 말했다.

서예관 쪽은 이 소중한 유물을 받으면서 그 뜻을 기리기 위해 '서예고전과 재해석'전을 마련했다. 26일부터 8월 25일까지 서예관 전관에서 열리는 이 특별전은 1부로 기증품 일부를 선보이는 '한·중·일 서예·고문헌 자료'전, 2부로 현대 서예가 33명이 우리 나라 서예 고전을 텍스트로 해 재해석한 '우리 글씨 체험보고'전으로 이뤄졌다.

전시를 기획한 이동국 전시과장은 "옛것을 보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전통을 되새김질해 지금 여기로까지 끌고 오자는 의도"라고 설명했다. 주로 중국의 글씨만을 법첩으로 해 따르는 서예계 현상을 돌아보며 이제는 한국 고전들도 텍스트로 해 공부하며 우리 서예의 독자성과 차별성을 찾자는 취지다.

1부 출품작은 김정희(1786~1856)의 '추사서론(秋史書論)', 석봉 한호(1543~1605)의 '애련설(愛蓮設)', 안평대군 이용(1418~53)의 '엄상좌찬(嚴上座贊)' 등 조선시대 명필들의 필적과 이름난 문인들이 남긴 '천자문', 각종 법첩을 비롯해 중국 당·송·원·명·청대의 필적과 한·중 금석문 자료, 일본의 서도잡지 초판본 등이다.

이제와 한 권씩 모으려면 불가능한 서예사 연구의 기초자료로, 특히 탁본은 어떤 글씨를 본으로 삼았는지 살필 수 있는 서체연구의 기준이 된다. 삼국이 서로 어떤 영향을 주고받으며 서예를 발전시켜 왔는가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권창륜·김양동·김태정·노상동씨 등 33명의 작가가 참가한 2부는 이옹이 기증한 우리나라 서예 고전을 나름대로 새롭게 펼쳐 보이는 자리다. 한글과 국한문 혼용, 해서, 예서·전서, 행서, 초서·행초서로 나누고 시대별 서풍이나 서예미도 안배해 한자 못지 않은 한글의 다양함을 뽐내도록 꾸렸다.

이과장은 "앞으로 한국 서예사에 이 시대를 사는 우리 작가들이 주인 되는 길을 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입장료 어른 3천원, 학생 2천원. 02-580-15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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