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홍업씨 집사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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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김대중 대통령 차남 홍업씨의 학교 동창이자 절친한 친구인 김성환씨가 법정에서 "나는 홍업씨의 집사로 민원을 해결해 주고 경비 명목으로 민원인들에게서 돈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金씨는 이와 함께 "처음에는 유진걸씨가 집사 역할을 하다 중간에는 나와 공동으로 했고 나중에는 나 혼자 집사 역할을 맡았으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홍업씨를 만날 수 없었다"고 덧붙였다.

집사의 사전적 의미는 '주인 가까이 있으면서 그 집 일을 맡아보는 사람'이다. 金씨의 진술은 심부름꾼 역할을 했다는 의미로 보이지만 홍업씨가 친구들에게 돌려가며 민원 해결사 역할을 맡기고 수금을 해온 사실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또 밖으로 내세울 만한 역할이 아닌데도 피고인 스스로 공개된 자리에서 왜 집사를 자처하고 나섰는지 궁금하다.

수사가 진행되면서 홍업씨 일행의 국정 농단이 얼마나 전방위로 행해졌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세무조사를 무마해주거나 모범납세자 표창 훈격을 한 등급 높여준 것은 홍업씨가 조세행정을 멋대로 주물렀다는 증거다. 또 검찰 고위 간부를 통해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을 불구속 기소토록 하고 울산시장 뇌물수수 사건 수사를 왜곡시킨 것은 홍업씨가 검찰권마저 좌우했다는 뜻이 아닌가. 권력의 두 축인 조세행정과 검찰권을 손에 쥐고 있었다면 그의 위상은 알 만하다.

민주화를 내세우는 국민의 정부에 웬 집사들이 이토록 횡행하는가. 金대통령의 영원한 집사라는 이수동씨가 있고, 또 대통령 아들의 자칭 집사가 등장한 것이다. 집사란 우리 역사엔 없는 제도지만 봉건제후 시대 권력자의 개인 비서가 여기에 속한다.

민주화된 공권력 체제에선 집사란 게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이 사물화·사유화될 때 집사라는 신종 직업이 생겨날 수 있다. 권력을 동원해 민원을 해결하려는 사회 풍조, 공직자의 권력 줄대기·눈치보기 풍토가 존재하는 한 집사라는 신종 직업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권력 주변 인사의 철저한 관리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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