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선진국 민주정치의 시련이 주는 교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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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치적 불안정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물론 세계를 휩쓸고 있는 금융위기라고 쉽게 지적할 수 있다. 이번 금융 지진은 그 진원지부터가 선진국 금융시장의 심장부인 월가(街)였고, 순식간에 전 세계로 파급된 금융 파탄의 최대 피해자 역시 선진국 경제였다. 따라서 위기 수습을 위한 국제적 대처 노력도 선진국 중심으로 추진될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이번 국제 금융위기가 선진 자유시장 경제의 심각한 취약점을 노출시켰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선진 시장경제의 위기 증상에 대한 진단과 분석은 이미 홍수를 이루고 있다. 거대 금융회사의 파산과 수많은 기업의 도산, 계속되는 실업률 증가, 경제성장의 둔화, 복지수준의 저하 등은 특별한 연구를 거치지 않더라도 쉽게 식별되는 위기 증상들이다. 이에 대한 대처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국가에 의한 강력한 시장개입이라 할 수 있다. 기업에 대한 구제금융, 세금감면, 금리인하, 실업수당 및 복지지원 증가 등 각국 정부가 취할 수 있는 위기 대처 정책의 폭과 리스트는 대체로 유사한 편이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경제 및 사회정책과 전략의 선택에 대해서는 광범위한 논의가 계속되겠지만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이러한 경제위기가 초래하는 정치적 압력은 무엇이며 그것이 민주 정치체제의 성격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에 대한 심도 있는 상황 인식이다. 경제위기 속에서 민주정치의 안정적 운영은 바로 우리 한국도 당면하고 있는 초미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심각한 경제위기는 국민의 재산 가치를 잠식하고 기업의 파탄과 대규모 실업 사태를 유발하며 광범위한 대중의 불만을 초래하게 되니 결국 정부에 대한 결정적 시장 개입과 구제정책 집행을 요구하게 된다. 이렇듯 급박한 위기 상황에 국가체제가 얼마나 신속하고 능률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 하는 시험은 곧바로 민주정치의 건전성, 즉 생존 가능성과 직결될 수 있다.

첫째, 대부분의 경제위기 수습책은 우선 발등의 급한 불부터 끄고 본다는, 그리고 가장 강력한 압력집단의 요구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는 상황 논리에 밀려 국가운영의 장기적 비전은 접어둔 채 단기적인 정치 파탄을 막는 데만 몰두하게 된다. 둘째, 그러한 임기응변의 수습책들은 균형 잡힌 발전정책의 희생과 비용을 수반할 수밖에 없으며 결국 국가부채의 급증으로 이어져 장기적으로는 민주 정치체제가 치명적 부담을 안게 될 뿐이다.

이른바 민주정치의 선진국에서도 경제위기의 여파로 정치적 불안정이 심화되는 현상을 리더십의 부실과 민주정치가 지닌 구조적 취약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우선 오늘의 선진 민주사회에서는 국민에게 장기적 비전을 제시하고 응분의 희생을 요구할 수 있는 지도자의 출현을 기대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즉각적 구제나 지원을 요구하는 상당수 국민의 요구를 억제하고 오히려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한 희생을 강조하면서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는 민주 정치제도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한편, 포퓰리즘의 압력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국가적 비전과 연계시키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국민의식에 내재하는 내셔널리즘에 호소하는 것이란 입장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경제위기 극복과 대중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독재에 대한 향수나 이른바 국가자본주의에 대한 매력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민주주의의 고사(枯死)를 자초하는 도박이 될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하고, 선진화의 문턱에 서게 된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는 우리로서는 선진 민주국가들이 겪고 있는 진통을 예사롭지 않은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다만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은 선진국들이 경제위기가 수반한 정치적 격랑에 휩쓸리면서도 국가적 안정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민주정치의 제도화, 특히 절차의 제도화가 완벽하기 때문이란 사실이다. 우리 정치는 날마다 절차적 규범과 규칙이 혼미한 가운데 민주정치의 위기를 외면한 채 위험한 이전투구(泥田鬪狗)로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넘어갈 시점이다.

이홍구 전 총리·본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