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달라진 한국축구 : '투사'로 자라 '멀티'로 뛰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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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국 축구대표팀이 지난 22일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진출하자 일본 언론들은 "한국 축구의 신화 창조는 정신력·체력·전술의 3박자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라고 극찬했다.

일본 언론의 평가대로 한국의 4강 진출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1년반 동안 집중 조련을 통해 선수들의 개인 기량과 체력, 팀 전술 등을 갈고 닦은 결과다.

◇거친 몸싸움, 넘치는 자신감

한국 축구는 그동안 유럽 축구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졌었다. 특히 큰 체구와 힘의 우위를 내세운 유럽의 플레이 앞에서는 맥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체격과 체력에서 뒤지는 것만을 탓할 뿐 선수들의 넘치는 투지를 경기력으로 전환시키지 못했고 몸싸움의 노하우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정종덕 SBS 축구채널 해설위원은 "몸싸움에서는 한 박자 빠른 것이 제일 중요하다. 역습 상황에서 미리 몸싸움으로 상대 공격을 끊어주면 가벼운 파울로 위기를 넘어갈 수 있지만 시기가 늦다 보면 경고나 퇴장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과거 한국 선수들은 이런 점에 대해 잘 몰랐었다"고 말했다.

'유럽 공포증'에 대해 히딩크 감독은 체력과 함께 거친 몸싸움을 처방으로 내놓았다. 히딩크 감독은 대회 개막 두달 전 ▶팔 뻗고 쪼그려 앉아 버티기▶등 맞대고 상대 밀기▶어깨잡고 밀어붙이기▶뛰어올라 가슴 밀치기 등의 동작을 집중 훈련시켰다. 유니폼을 잡는 상대 선수를 뿌리치고 달리는 훈련도 했다.

신체 조건이 뛰어난 유럽 선수를 상대로 투지만 앞세워 막무가내로 달려들기보다는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근력을 단련시키고, 잔기술을 터득하도록 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의 단련은 국제경기만 나서면 '범생이'로 일관했던 선수들을 '투사'로 바꿨다. 거친 태클과 격렬한 몸싸움을 마다하지 않았고, 심판의 눈을 피해 상대 선수의 옷을 잡아당기거나 미는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이런 훈련의 결과 월드컵 개막전 수차례 유럽팀과의 평가전에서 선수들은 "유럽 선수도 별거 아니더라"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더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지치지 않는 적토마 체력

한국과의 16강전에서 패한 이탈리아의 공격수 비에리는 경기 전 "한국 선수들은 빠르고 경기 내내 뛰어다니며 득점 기회를 만들기 때문에 상대하기 아주 어려울 것"이라며 엄살을 떨었다.

일본의 스포츠 전문지들은 "히딩크 감독이 일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체력 강화에 역점을 둬온 결과 선수들의 정신적·육체적인 강인함이 4강 진출의 결실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체력적인 위기의 가능성이 점쳐진 독일과의 4강전에서도 전반전 후반 체력이 떨어진 듯하던 대표팀은 하프타임 뒤 15분간 쉬고 난 후 어디서 솟았는지 후반전 중반까지도 독일을 몰아붙이는 힘이 남아 있었다.

과거와 달리 대표팀 체력이 급상승하게 된 것은 지난해 말부터 도입한 체력 강화 프로그램의 결과다. 네덜란드 대표팀 출신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피지컬 트레이너가 진행하는 체력 강화 프로그램은 실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운동 상황을 평소 훈련에서 재연,실전 체력을 기르는데 있다. 실전처럼 걷기-가볍게 달리기-전력 질주가 반복되는 다양한 패턴의 훈련 방식이 도입됐고, 선수들의 피로회복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25m를 왕복 달리는 '셔틀 런'이 등장했다.

정종덕 위원은 "대표팀 체력의 급상승은 지난해 12월부터 6개월간 체력훈련에 전념한 결과다.집중적인 체력훈련을 통해 25세 미만의 젊은 선수들은 깜짝 놀랄 만큼 체력이 좋아졌고,25세 이상의 고참 선수들은 과거 최전성기의 체력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변화무쌍한 맞춤 전형

SBS 강신우 해설위원은 "과거 한국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전술이 오히려 위험하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3-5-2 포메이션 한가지만 고집했다"며 경직된 전술을 꼬집었다.

하지만 포메이션에 관한 한 현 대표팀은 자유자재다. 상대팀에 따라, 또 경기 중 상황에 따라 포메이션과 포지션별 선수 배치를 유연하게 바꾼다.

한국의 16강 진출을 결정할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은 폴란드·미국전에서 사용했던 스리백 시스템 대신 최후방에 네 명의 수비수를 세우는 포백으로 수비 시스템 변화를 시사했다. 화려한 공격축구를 구사하는 포르투갈의 막강 화력을 막기 위한 대응책이었다.

대표팀은 그러나 이탈리아를 맞아서는 스리백을 고수했다. 플레이 메이커 토티의 활동 반경이 넓긴 하지만 비에리-델피에로 투톱은 스리백으로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히딩크 감독은 이탈리아에 선제골을 내주자 후반 수비의 핵 김남일·홍명보를 차례로 빼고 이천수·차두리 등을 투입, 공격력을 극대화했다. 그 결과 후반전 종반 한때 설기현·황선홍·안정환·이천수·차두리 등 공격수 5명이 나란히 일렬로 이탈리아 수비진을 압박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히딩크 전술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인 유연함은 부임 초기부터 과거 대표팀의 전형적인 수비 시스템이었던 스위퍼 시스템을 없애고 일자 수비를 도입한 후 포백·스리백 시스템을 번갈아가며 꾸준히 훈련한 결과다.

◇'일인다역(一人多役)' 멀티 플레이어

히딩크 감독은 부임 이후 공격수는 공격수로서, 수비수는 수비수로서 '한 우물을 파라'고 강조해 왔던 고정 관념을 과감하게 버렸다. 그는 "적어도 2~3개의 포지션은 충분히 소화해낼 수 있는 멀티 플레이어가 필요하다"고 여러번 강조해 왔다.

주축 선수의 부상과 다양한 전술 변화와 같은 상황에서도 팀의 플레이가 완벽하게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히딩크 감독은 대표팀 선발에서부터 이런 주장을 관철했다. 이동국·고종수 등과 같이 골문 앞에서만 어슬렁거리는 공격수는 탈락했고, 수비가담 능력이 떨어진 안정환·윤정환 등은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간신히 합류했다.

대신 여러 개의 포지션에 투입할 수 있는 송종국·박지성·이천수·최태욱 등은 히딩크 감독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고, 유상철은 든든한 버팀목으로 평가받았다.

원조 멀티 플레이어인 송종국은 오른쪽 윙에서 공격형 미드필더·센터백·사이드백 등 어느 자리에서건 능숙하고, 수비형 미드필더 박지성은 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 자리를 부지런히 오르내린다.

한국의 4강 진출은 멀티 플레이어 때문에 가능했다. 공격수를 모두 가용, 반전을 노렸던 이탈리아와의 16강전 후반 중앙 미드필더 유상철은 중앙 수비수로, 오른쪽 미드필더 송종국은 오른쪽 풀백으로, 최전방에서 스리톱을 맡던 박지성은 수비형 미드필더의 자리를 메웠다.

신준봉·이철재 기자

아직 3,4위전과 결승전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한국축구대표팀은 당초 목표했던 16강을 넘어 4강 진입에 성공했다. 아시아 최초의 월드컵, 최초의 공동 개최로 관심을 모았던 2002 한·일 월드컵은 당초 우려를 깨끗이 씻고 성공적인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세차례에 걸쳐 이번 월드컵을 정리해 본다.

<시리즈 순서>

① 달라진 한국 축구

② 대회 운영도 이만하면

③ '히딩크 이후'가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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