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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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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40년 전 이맘때 서울 날씨는 꽤 찼던 듯하다. 작가 김승옥씨가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에서 "거리는 영화광고에서 본 식민지의 거리처럼 춥고 한산했고, 그러나 여전히 소주 광고는 부지런히, 약 광고는 게으름을 피우며 반짝이고 있었고"라고 쓴 대목을 보면 썰렁한 추위와 함께 황량한 길거리 풍경이 목덜미를 움츠러들게 만든다.

실제로 64년 겨울 서울은 추웠다. 한.일 회담과 한.일 기본조약 반대 시위로 뜨거웠던 여름이 가자 서울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군사정부의 군홧발에 얼어붙었다. 그 해 겨울, 서울의 한 포장마차와 중국요릿집에 세 남자를 불러 앉힌 김승옥씨는 그들 입을 통해 어지간히 고독하고 고통스러운 64년의 서울살이와 겨울나기를 웅얼거린다. 파리와 데모와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한다고 엉뚱한 말을 주고받던 그들은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당시의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여관방으로 들어가 웅크리고 죽고 헤어진다.

'서울 2004년 겨울'은 40년 전에 비하면 따듯하고 번지르르하다.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른 서울은 급성장한 아시아의 다른 도시보다 더 크고 풍부하고 다양한 도시 조건을 지녔다. 600년 역사의 문화적 흥취와 고도성장이 일군 초고층빌딩의 어울림이 비빔밥처럼 뒤섞여 돌아가는 곳이 서울이다. 노래방.찜질방.전화방.비디오방.PC방…넘쳐나는 방도 이제는 절망과 깨달음의 방이 아니라 욕망을 발산하고 소비하는 한국인 특유의 고치가 됐다.

미국 일간지 뉴욕 타임스가 엊그제 레저 면에 서울을 도쿄 못지 않게 재미있으면서도 덜 번잡하며 더 싸게 가볼 만한 도시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서울을 '새 도쿄'라 불렀다. 우리는 서울만이 지닌 힘과 열기와 개성이 넘쳐서 추천받았다고 생각했는데 파란 눈에는 서울이 여전히 유행과 외모에서 식민지의 거리로 비치는가 싶어 춥다.

'신행정수도 건설'이니 '행정중심도시'니 시끄러운 논란 속에서 서울이 관광지로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다. 서울이 서울을 떠난다고 서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서울은 서울에 사는 사람들 손에 달려 있다. 그들의 서울살이가 얼마나 서울시민다우냐에 따라 서울은 남는다. 서울 1964년 겨울의 포장마차와 중국요릿집과 여관방을 전전하던 그들처럼.

정재숙 문화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