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페레스 부총리 인터뷰]"팔레스타인 독립 평화안 추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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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마잘토브('축하한다'는 뜻의 히브리어)! 오늘은 한국민과 아시아 전체에 참으로 기쁜 날입니다." 23일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외무부 청사에서 기자와 만난 시몬 페레스(79)이스라엘 부총리 겸 외무장관은 전날 월드컵 4강에 오른 한국팀의 쾌거를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말로 중앙일보와의 단독 인터뷰를 시작했다.

페레스 부총리는 1년9개월째 팔레스타인과 유혈분쟁을 벌이고 있는 이 나라의 온건파를 대표하는 좌파 노동당의 총수다. 이스라엘 현역 정치인 중 최고원로이기도 한 그는 1993년 팔레스타인과 '땅과 평화의 교환'으로 요약되는 오슬로 협정을 맺어 중동평화의 초석을 마련한 주역 중 한명이다.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총리가 이끄는 리쿠드당과 함께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페레스는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일관해온 강경파 샤론에 맞서 '대화를 통한 해결'을 추구해 왔다.

팔순의 나이에도 꼿꼿함을 잃지 않은 그는 분쟁의 최일선에 서있는 탓인지 인터뷰 내내 근엄한 표정을 풀지 않았지만 간간이 감출 수 없는 피로감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대화 도중 '평화''화해' 같은 단어가 나올 때면 어느새 미소를 지으며 정열을 발산했다.

페레스 부총리는 인터뷰에서 노동당이 조만간 발표할 획기적인 중동평화 구상을 처음 공개했다. 골자는 ▶테러 중단 1개월 내 팔레스타인 임시국가 승인▶그후 1년 이내 팔레스타인 영토 확정▶최종 독립협상 등이다.

이 구상은 구체적인 팔레스타인 독립 일정을 제시하고 있어 지금까지 나온 평화안 중 가장 적극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최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이 악화되면서 오슬로 협정이 죽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래도 중동지역에 평화를 이루려면 오슬로 협정을 되살리는 길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첫 질문이 조금 무거운 것 같았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오슬로 협정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잠시 정지돼 있을 뿐입니다. 대다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인들의 마음 속에는 협정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들이 합해져 조만간 협상이 재개되면 이땅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라는 2개의 국가가 세워져 공존과 상호번영을 실현하게 될 겁니다. "

-그러나 부총리는 "이스라엘은 입이 여러개지만 총은 하나인 반면 팔레스타인은 입은 하나지만 총은 여럿"이라는 비유를 들며 골 깊은 대립을 한탄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협상을 재개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여러번 이런 질문을 받은 듯 그는 빙긋 웃었다)지금 분쟁이 심한 것 같지만 사실 양쪽 다 지칠 대로 지쳐 있습니다. 극단적 싸움 직후에 오히려 획기적인 화해의 기회가 있는 법입니다. 다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화해는 둘만의 노력으론 힘들고 국제사회의 도움이 진정으로 필요합니다. 유럽연합(EU)과 러시아, 그리고 무엇보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주도적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이들 나라가 적극적으로 성원한다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등을 떼밀려서라도 대화 테이블에 앉게 될 겁니다. "

-최근 아리엘 샤론 총리가 팔레스타인 강경진압에 눌려 장관과 노동당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 노동당은 획기적인 중동평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총회를 열고 행동에 들어갈 계획입니다. "

-어떤 내용입니까.

"타임 테이블에 입각한 단계별 구상입니다. 우선 팔레스타인이 한달 내로 성실하게 테러를 억제하고 중단시킨다면 이스라엘은 바로 팔레스타인을 영토가 미확정된 임시국가로 인정해 줄 방침입니다. 그후 유엔의 협조 아래 양측은 1년 시한을 두고 팔레스타인 국가의 경계를 확정하는 협상을 갖습니다. 1년 뒤 유엔은 협상 진행정도를 검증하고, 내용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노동당은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평화안을 곧 이스라엘 내각에 제출할 겁니다. 물론 정부정책이 되도록 만들어야지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서도 이 안에 긍정적인 사람이 많고, 부시 대통령도 이 안을 잘 알고 있습니다. "

-잘 되면 획기적인 안이 되겠군요. 그러나 샤론 총리는 얼마 전 자폭 공격 현장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런 참상 앞에서 임시국가가 웬 말이냐"고 했고 부시 대통령도 자폭공격이 이어지자 평화안 발표를 연기했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어떻게 노동당 평화안을 밀고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는 이 대목에서 눈을 바닥으로 고정시키고 조금은 한숨을 쉬는 듯하더니 이윽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을 시작했다.)"강경책만으로는 결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테러와 관계없이 협상은 반드시 진행돼야 합니다." (계속되는 그의 말은 더 신중해지고 더 느려졌다.)"이스라엘 정부 내의 반대파는 설득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지만 팔레스타인의 테러는 우리 손으로 막을 수가 없어요. 협상이 빠르게 잘 풀리려면 팔레스타인이 테러를 근절해야 합니다. "

-자폭 공격이 늘어나면서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을 추방해야 하며 후임자가 등장할 때까지 협상을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옵니다.

"아라파트 수반은 현재 팔레스타인의 합법적인 대표자고 이스라엘의 협상 파트너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아라파트 수반이 지금처럼 독재를 고집한다면 조만간 리더십을 잃게 될 것입니다. 지금 팔레스타인은 협상을 위해서나,생존을 위해서나 개혁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부패를 청산하고 테러를 자행하는 세력을 뿌리뽑아야 국민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고 협상에서도 지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

-한국민들은 민간인들에 대한 자폭공격을 용납할 수 없는 만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도 종종 과잉진압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지난 4월 제닌 난민촌의 '대학살' 소문이 그 대표적 예입니다.

"한 이스라엘 신문은 내가 '제닌에서의 이스라엘군 진압은 학살'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습니다만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제닌에서 수만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했지만 유엔 조사 결과 소수가 다쳤을 뿐 학살은 없었음이 드러났습니다. 팔레스타인이 왜 협상에 조금도 도움이 안되는 테러를 그치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

기자가 "오랜 분쟁협상 경험에 비추어 최근 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남북관계에 대해 조언해 달라"고 말머리를 돌리자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먼저 이쪽에서 인내하면 언젠가 화해가 이뤄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은 혁명적 에너지의 나라다. 얼마 전 정보기술(IT)혁명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더니 월드컵에서의 '스포츠 혁명'으로 또 한번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렇게 뛰어난 민족이라면 '정치혁명(통일)'도 문제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문화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그는 1997년 방한 당시 들렀던 교보문고의 규모에 감탄하면서 전 주한 이스라엘 대사 부인이 번역한 한국어 시집 한권을 샀다고 한다.

그는 "한국 시는 정갈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있어 지금도 시집을 서재에 꽂아두고 틈날 때마다 음미하고 있다"면서 특히 한용운의 '복종'을 애송시로 꼽았다.

만난 사람 = 강찬호 기자

예루살렘=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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