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용석의 Wine&] 까칠한 피노 누아, 오리건 토양과 만나 ‘명품 탄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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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5면

2005년 개봉한 영화 ‘사이드웨이’는 와인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메디다. 영화 속 주인공 마일즈는 이혼 후 와인과 우울증 치료제로 하루하루를 지탱하는 소심한 남자. 매사에 심각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와인은 피노 누아(Pinot noir) 와인이다. 그는 극중 여주인공이 자신에게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피노 누아는 재배하기 힘든 품종이라 와인으로 만들면 맛이 더 오묘하다”고 답한다. 영화가 나온 후 전 세계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한동안 피노 누아 열풍이 불었다.

피노 누아는 고온에 약하고 습한 곳을 싫어한다. 서늘하면서도 그늘지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건조하지 않은 지역에서 잘 자란다. 토양은 척박하면서도 석회석과 편암질의 점토가 섞여 있으면 좋다. 포도 껍질이 얇아 양조 과정에서 와인색을 내기도 쉽지 않다. 이처럼 ‘까칠한’ 품종인 피노 누아를 재배하기 좋은 곳이 프랑스 부르고뉴다. 부르고뉴는 예부터 피노 누아 단일 품종으로만 레드 와인을 만들었다.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온 양조 방식과 생산자들의 장인정신은 피노 누아를 부르고뉴만의 전유물로 만들었다. 가격도 비싸기로 유명하다.

부르고뉴에 도전장을 낸 곳이 늘고 있다. 대표주자가 미국의 오리건주다. 부르고뉴와 비슷한 위도(45도)와 기후를 자랑하는 오리건은 가격 대비 뛰어난 피노 누아 생산지로 각광받는다. 지난달 중순 오리건의 포도밭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이를 느낄 수 있었다. 경사진 언덕에 위치한 포도밭, 하루 사이 초가을과 한여름 날씨를 오가는 큰 일교차, 붉은색을 띤 점토질 등이 부르고뉴와 꼭 닮은꼴이었다. 오리건주 크리스톰 와인의 존 다나 이사는 “화산 지형과 해안 지형으로 나뉘는 오리건 포도밭들은 토양에 미네랄이나 철분이 많아 와인의 산미가 높고 복합적인 풍미가 있다”며 “부르고뉴에 비해 역사는 짧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좋은 와인이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오리건 와인의 키워드는 혁신과 여유다. 오리건 양조장 오너들은 대부분 순수 와인 애호가들로 제약회사 최고경영자(CEO)에서부터 엔지니어, 항공기 조종사 등에 이르기까지 본업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이들은 비용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의 와인만을 추구한다. 재력을 바탕으로 최신식 설비 투자에 돈을 아끼지 않지만 양조 방식은 부르고뉴 전통을 따른다. 오리건 와인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도멘 시린(Serene)이 좋은 예다. 제약회사를 운영하던 그레이스와 켄 이븐스태드 부부가 조성한 이 양조장은 유기농 재배를 하면서 수확량을 조절해 집중력이 높은 와인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회사가 내놓은 이븐스태드 와인(사진)의 경우 현지 전문가들을 상대로 한 시음회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는 로마네 콩티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 화제가 됐다. 도멘 시린의 루커스 윌렛 매니저는 “일부 와인은 출시하자마자 한 달 만에 동이 날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손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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