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아이] 누가 미 항모를 서해로 불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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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가 언제쯤 서해로 들어오나.” 중국 언론계의 한 지인이 며칠 전 나에게 불쑥 물어왔다. 대답이 마땅찮아 “언제 올지 중국이 먼저 알게 되면 나에게도 좀 알려 달라”며 농반진반으로 대했지만 솔직히 찜찜했다.

천안함 사건이 터진 지 100일이 지났지만 한국과 중국 외교가 여전히 천안함 이슈에 발목이 잡혀 있어 안타깝기 때문이다. 2008년 5월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선언한 한·중 관계는 ‘천안함 어뢰’ 한 방에 파행을 겪고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과 동북아 공동체 구상 같은 미래지향적 논의는 실종되다시피 했다. 천안함 피격 때 생성된 버블제트의 파장은 양국 국민의 감정에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네티즌들의 상호 비방은 극한을 치달았다.

매주 화·목요일 열리는 중국 외교부의 정례 브리핑에서도 천안함 이슈는 여전히 관심사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중시하고 시비곡직(是非曲直)에 따라 판단하겠다”면서도 진상을 애써 외면해 온 중국의 대국답지 않은 태도가 문제를 장기화시켰다는 지적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중국의 관변 학자와 언론들은 미 항공모함의 서해 진입 여부를 대대적으로 이슈화하고 있다. 천안함을 지면에서 끌어내리고 그 빈 자리에 조지 워싱턴호를 대신 띄우고 있다. 이런 선전을 보면 피해자인 한국은 간데없고, 중국이 한·미의 연합 훈련으로 안보를 위협받는 잠재적 피해자로 갑자기 둔갑해 보인다. 중국의 군사 전문가는 “미 항모가 서해에 들어오면 살아 있는 표적이 될 것”이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는다. “미 항모가 공해에서 훈련하면 국제법상 문제가 없다”고 인정하면서도 베이징이 훈련 반경에 들어가기 때문에 중국의 안보가 위협받는다는 논리를 편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미 항모를 서해로 불러들였나. 북방한계선(NLL)을 도발해 46명을 희생시킨 북한이다. 천안함 사건이 터지기 전에 미 항모는 서해에 굳이 들어올 이유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미 항모를 불러들인 또 다른 주체는 중국이다. 주중 한국대사관 고위 관계자의 표현처럼 “천안함 사건은 한국의 핵심 국익인 안보와 직결된 중대 사안”이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의 핵심 국익이 침해당했는데도 중국은 “냉정을 유지하라”고 엉뚱한 충고를 해왔다. 중국이 핵심 국익이라고 주장해 온 대만·티베트·신장(新疆)에서 천안함 같은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웃 한국이 “흥분하지 말고 자제하라”고 한다면 중국인들은 수긍할까.

한반도의 평화를 깬 세력에 무력 보복이 아니라 준엄한 경고라도 해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주권국가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유엔에서 북한의 도발에 대한 비난과 경고조차 중국의 비협조로 무산될 수 있는 상황에서 국제법상 문제가 없는 한·미의 군사훈련은 시비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미 항모의 서해 진입 여부에 조바심을 내는 중국인들에게 힌트를 주고 싶다. 미 항모가 오느냐 마느냐는 한·미가 아닌 중국의 태도에 달려 있다고.

장세정 베이징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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