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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나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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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하늘이 높푸르다거나 산과 물에 꽃수를 놓은 비단이라거나 그래서 우리의 국토가 금수강산인 것은 아니다. 꽃피고 잎지고 눈 내리는 사시사철, 아침 해 저녁 노을, 차고 기우는 달빛까지도 우리 겨레는 그 아름다움을 마음에 아로 새기고 노래로 쏟아내는 시의 겨레였거니, 그 말씀의 옷을 입어 금수강산이라 하지 않던가.

바람이, 물이, 흙이 산업의 찌꺼기와 쓰레기에 멍이 들고 생기를 잃어가는 것은 안타까워 하면서도 정작 물질이나 헛된 욕망에 찌들고 메말라가는 사람의 마음은 어찌 모른 체하는 것인가. 우리는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모국어를 가지고 태어났고 글을 익히면 곧 시를 쓰는 삶을 누려왔거니 이제 시의 종주국으로 다시 일어서야만 한다.

한동안 주린 배 채우느라 마음의 식량을 못챙겼지만 이제는 허리띠 느슨히 풀었으니 마음에도 넉넉한 햇빛, 바람, 물, 흙을 채워줄 일이다. 그 일은 아이 어른 없이 시의 집을 짓고 시의 등불을 밝히는 일이다. 시의 집은 교회당보다 더 많아도 좋다. 하루의 일이 끝나면 마을마다 시의 집에 불이 켜지고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할머니와 손주가 돌아가며 시낭송을 하는 소리가 낭랑히 울려퍼져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좋은 시를 많이 읽게 해야 한다. 마을의 공회당, 경노당, 교회, 학교, 기타 휴식공간에는 많은 시집들을 꽂아놓고 누구든 자기 마음에 드는 시를 골라서 읽게 해야 한다. 길쌈을 하면서도 밭을 갈면서도 학교가는 길에서도 입속으로는 시가 외워지고 모여서 서로 좋은 시를 뽐내려 낭송하고… 그러다가 저절로 시가 쓰여져서 이 나라 7천만이 모두 시인이 되면 더욱 복받을 일이다.

아프리카의 세네갈에는 1970년대 후반 셍고르라는 시인이 대통령이 됐었다. 주말이면 점퍼 차림으로 파리로 날아가 시낭송회에도 가는 그는 장관을 반 넘게 시인으로 임명했는데도 너무 정치를 잘해 세네갈 국민이 종신대통령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셍고르는 국민의 참뜻을 마다하고 임기를 마치고는 파리로 떠나 후계자를 편하게 해주었다. 시인공화국에 시인대통령이면 우리도 정치가 시처럼 맑게 흐르지 않을까 .

집을 짓는 일은 돈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러니 먼저 도시는 물론 시를 쓸 만한 공간은 찾으면 있을 터, 공공의 장소를 빌려쓰고 10년이나 20년쯤 뒤에 가서 시집이 쌓이고 시낭송이 흐르는 작고 이쁜 집 하나쯤은 지을 만하지 않을까!

한글을 깨치면 바로 동시부터 외게 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나이면 적어도 2,3백편쯤은 거뜬히 암송하게 된다. 대학입시나 사법·행정 고시, 공무원 승진 시험에도 시 짓기가 필수 과목이 된다. 거리의 리어카나 카페에서는 시인의 육성이나 시낭송가들의 낭송이 흘러나오고 TV에서는 다투어 열린 시낭송회가 시청률을 높이고 있다.

전남 담양에 가면 송강정·식영정·소쇄원·면앙정 등 저 호남가단의 쩌렁쩌렁한 시인묵객들이 모여 시를 짓고 읊조릴 정자가 있고 평양의 대동강가에는 연광정·북벽루 등 시인들이 즐겨찾던 다락이 있다. 어디 그곳만이랴. 이 나라 산과 물이 있는 곳에 정자·서원·사찰 등이 모두 시의 요람터였나니, 바위 하나 나무 하나도 시가 깃들지 않고 시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

백두·금강·묘향·설악·지리·한라·압록·대동·한강·낙동·섬진… 명산대천에 모이는 사람들은 시로 흥을 돋우고, 사랑하는 이들만 시의 눈빛을 켜랴, 아침 인사 시로 주고 받으니 시로 통일이 오고 시로 평화가 오고 시로 더불어 행복한 세상이 되었구나.

러시아에서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려면 1백50편의 시를 외워야 하고 남극기지의 미국인들은 주말이면 시낭송회를 연다고 한다. 고장마다 '올해의 시인'이 뽑히고 큰 기업에는 상주시인이 시 짓기와 시낭송모임을 이끌고 대학에는 초빙 시인이 캠퍼스의 쉴 곳에서 학생들과 시와 인생을 이야기한다.

청마로, 영랑시, 목월공원, 미당광장….

시인의 이름이 나붙고 동상이 서고 마을 입구마다 시비(詩碑)가 길을 안내해준다.

시로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나라, 이 나라에 전쟁이나 분단, 억압이나 갈등은 발을 못 붙인 지 오래다. 나는 시의 집이 잔치를 벌이는 방방곡곡을 삿갓이나 쓰고 떠돌며 시 한수로 배불리고 살리라.

<시인·한국시인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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