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월가 문전박대 엊그제 같은데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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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필자한테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에서 온 금융인, 기업인이라면 대부분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다. 10여 년 전 아시아에 외환위기가 한창일 때 자금 조달을 위해 이들을 만나려다 번번이 문전박대를 당한 경험에 비춰 거의 충격적인 변화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지만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위상 변화는 정말 놀랍기만 하다. 1990년대 말 엄청난 기업 부채와 취약한 은행 재무구조 때문에 한국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미운 오리새끼 취급을 받아야 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자금을 지원받은 후 한국은 경제주권을 상실하다시피 했다. 국민과 정부는 처절한 심정으로 기업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후 IMF가 주도한 구조조정 과정에서 국내의 귀중한 자산들이 헐값으로 외국 투자자에게 팔려 나가는 모습도 우리의 자존심을 크게 손상시켰다.

그러나 지금 한국 기업들은 예전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다. 우수한 제품으로 세계 시장을 주름잡을 뿐 아니라 선진국 어떤 기업에 뒤지지 않는 양호한 재무구조를 자랑하고 있다. 국내 금융회사도 우수한 자산 건전성을 바탕으로 해외에서 투자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특히 2008년 월가의 금융위기가 선진국의 경제와 기업에 큰 타격을 준 반면 한국의 경제와 기업은 초기의 위기 상황을 신속히 극복하고 빠른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세계 경제의 미래를 논의하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본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회사가 다른 한국 투자자들과 함께 지난해 뉴욕 맨해튼의 상징적인 건물인 AIG 본사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일 것이다. 당시 17개국에서 30개의 국제 컨소시엄이 맨해튼 중심가에서 가장 높은 이 건물을 인수하기 위해 경쟁했다. 결과는 한국계 컨소시엄의 승리로 끝났다. 물론 우리보다 더 높은 입찰가를 제시한 곳도 있었다. 하지만 판매 주간사는 한국 기업의 건전성과 신뢰성을 보고 우리를 선정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 등 선진국의 경제와 기업에 대해선 많은 회의가 제기되고 있었다. 또 중국 등 신흥국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믿음이 가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나 격변하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영원한 승자나 영웅은 없다. 월가의 중역들이 금융공학의 천재에서 하루아침에 탐욕스러운 사기꾼으로 몰락했듯이 한국의 위치 또한 과거로 다시 추락할 수 있다. 선진국 금융인들이 우리를 환대하는 것도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 우리를 좋아해서는 아닐 것이다. 한국 경제나 기업이 휘청하면 어느 때고 우리는 다시 미운 오리 새끼가 될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월가의 환대가 더욱 조심스럽게 느껴진다.

김종대 금호종합금융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