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석기자의북한농장방문기>"南서 보내준 이앙기 고장없어 좋습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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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의 이용선(庸瑄) 사무총장 등 13명이 이 단체가 지원하는 북한 농기계수리공장 건설 현장을 방문하기 위해 지난 21일부터 닷새간 평양을 방문했다. 본사 통일문화연구소 고수석 기자는 이번 방문에 동행, 남측 기자로는 처음으로 국영농장을 방문해 취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남한측이 지원한 이앙기로 북한 농부들이 모내기를 하는 등 변모하고 있는 북한농업의 현장을 살펴봤다.

편집자

평양시 사동구역 남산동에 위치한 미림시험농장. 평양 시내에서 동쪽으로 자동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이 곳은 농업과학원 산하 농장으로, 새로운 농업 기술을 시험하거나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한다.

지난 24일 오후 2시30분쯤 이곳을 방문하자 한 농민이 이앙기로 비지땀을 흘리며 모심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 이앙기는 바로 지난해 5월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측이 북측에 지원한 것.

"이앙기를 어떻게 쓰게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농민은 "지난해 6월부터 남한 측이 보내 준 설명서를 보고 모판을 이앙기에 싣고, 모를 나누는 방법 등을 배웠습네다"라고 말했다.

그는 "운전은 잘 하기 때문에 따로 배울 필요가 없었다"며 "남조선 이앙기가 고장나지 않고 잘 달려 좋습네다"라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또 다른 농민은 "우리 측 이앙기와 비교해 볼 때 솔직히 부럽기도 합네다"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남한에서 보낸 이앙기가 올해부터 북측의 농사를 지원하는 데 본격 투입되고 있다.

북한은 지금까지 모심는 간격을 20㎝로 해 남한보다 10㎝ 정도 폭이 좁았다. 이는 북한이 1970년대부터 주장한 이른바 '주체농법'에 따른 것이다.

주체농법의 특징은 한마디로 농업 생산을 집약(集約)하자는 농법으로, 크게 ▶포기 농사의 원칙▶적지적작(適地適作)·적기적작(適期適作)의 원칙▶과학적 영농 방법의 실현 등 세가지 목표를 갖고 있다.

그런데 지력(地力)이 떨어지는 데다 비료 공급도 여의치 못한 상황에서, 포기 농사에 따른 밀식(密植)재배를 고수하는 바람에 벼가 실하게 자라지 못했던 것. 이날 만난 북측 관계자도 이 대목을 인정했다.

곳곳 '모내기 전투'푯말

그러나 모심는 간격이 30㎝인 남한 측 이앙기가 앞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북한 농업에 결정적인 변화가 올 것으로 보인다.

농업과학원 농업기계화연구소 박길남 소장은 "북한에서 식량이 증산되기 위해선 북남이 합쳐 우리 땅에 맞는 새로운 농기계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남측 이앙기 사용 성과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북한 농업과학원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한 두 곳에 모내기를 실험적으로 해 본 결과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모내기에선 남측 이앙기와 함께 북한산 이앙기 한대도 동원됐다. 조금 낡아 보여 "언제 만든 것이냐"고 묻자 한 안내원은 "20년쯤 됐습니다"라고 답변했다.

그런 탓인지 이날도 이 이앙기로 모를 심던 중 방향을 바꾸면서 멈춰 섰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기술자가 다가가 10여분간 응급처치한 후에야 다시 가동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에선 이런 이앙기의 수도 얼마 안돼 다른 농장에서는 찾아보기 정도라고 한다. 동행한 김성훈(金成勳)전 농림부 장관은 "지난해는 간헐적이나마 농기계를 볼 수 있었는데 올해는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서 "특히 부품 부족이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농장 내 건너편 논에는 이앙기가 없는 탓인지 농민들이 허리를 숙인 채 일렬로 수(手)작업으로 모내기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햇빛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썼고, 여자들은 모자 위에 덧씌운 보자기로 얼굴을 가렸다.

일부 농민은 허리를 잠시 폈다가 이앙기로 모심는 장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했다.

이런 모습이 안타까운 듯 농업과학원 이경식 부원장은 기자에게 "짧은 기간 내에 북남이 힘을 합쳐 농업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공동사업을 진행합세다"라고 제안했다.

스타킹 신고 모내기도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은 최근까지 보행 이앙기 50대·승용 이앙기 2대를 보냈으며, 이들 이앙기는 평안북도 정주시 등 농업과학원 분소에 배치됐다.

동행한 한국농기계공업협동조합 윤여두(尹汝斗)이사장은 "이앙기와 함께 벼를 수확하는 콤바인도 지금보다 더 지원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수작업으로 수확하다 보니 알곡 손실이 15~20% 되기 때문이라는 것.

북한은 지난 10일을 전후해 모내기가 한창이었다고 한다.평양시 외곽 일대 협동농장에는 '모두 다 모내기 전투에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표지판이 곳곳에 보였다.

미림시험농장은 최근 모내기를 시작했다. 이처럼 다른 지역보다 다소 늦은 이유는 토지 정리가 막 끝났기 때문이라고 농장의 한 관계자가 전했다.

북한의 여성 농민 가운데 일부는 모내기할 때 거머리 방지용으로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이날 만난 한 여자 농민은 "최근엔 모내기 전투가 시작되면서 스타킹 보급량이 조금씩 늘었으나 스타킹이 익숙하지 않아 불편합네다"라며 모판을 이앙기 운전사에게 전달하면서 흘러내리는 스타킹을 연신 올리곤 했다.

이 농장의 건너편 협동농장에선 긴 파이프를 연결, 물대기가 한창이었다.

"올해는 가뭄 없어 다행"

지난달 29일 노동신문은 '논농사는 물농사'라고 강조한 적이 있는데, 안내원은 "올해는 적당히 비가 내려 물대기가 예년보다 수월해졌다"고 말했다.

'모내기 전투' 중 잠시 쉬는 시간은 북한 농민들에게도 꿀맛인 것 같았다.원두막에 앉아 담배를 피는 농민들은 흘러내리는 땀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허리를 연신 두드렸다.

지원을 나온 학생들도 농장 지도원의 지시에 따라 모를 심은 뒤 삼삼오오 모여 주패놀이(카드놀이)를 하거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이날 낮 최고 기온은 27도를 넘어 몹시 후덥지근했다. 농민들은 무더위를 잠시 잊으려는 듯 논두렁에서 에스키모(아이스크림 일종)를 나눠 먹기도 했다.

평양=고수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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