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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년 대담 - 2004년을 말한다] <상> 이해인 수녀 vs 향적 스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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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004 갑신년도 이제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본지는 올 한 해를 차분하게 되돌아보고 성찰하자는 취지에서 '송년 좌담-2004 한국 사회를 말한다' 대담 시리즈(총 3회)를 마련했습니다. 첫 순서는 가톨릭의 이해인 수녀와 불교 조계종의 향적 스님이 맡았습니다. 이어 문부식 '당대비평' 편집위원과 박명림 연세대 교수, 한완상 적십자사 총재와 유종호 연세대 석좌교수의 대담이 게재될 예정입니다.

▶ "예수님의 사랑과 부처님의 자비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서울시청 앞에 환하게 불이 밝혀진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종교를 달리하는 가톨릭의 이해인 수녀(左)와 불교의 향적스님이 어렵지 않게 합의를 보았다.[변선구 기자]

▶이해인 수녀=반갑습니다. 스님은 가톨릭과 맺었던 인연이 상당하시더라고요. 제 이름과도 같은 불교 월간지 '해인'을 창간, 초대 편집장으로 계실 때 그 잡지 인쇄를 경북 왜관의 베네딕도 수도원 인쇄소에 의뢰했다고 들었습니다.

▶향적 스님='살아 있는 언어를 통해 대중의 아픔에 접근하자'는 뜻으로 1984년 만든 게 '해인'이지요. 마침 편집실이 대구 바오로서원 근처였고, 그때 가톨릭 월간지 '성서와 함께'도 열심히 구독했죠.

▶이해인=그럼 진 토머스 신부님도 아시겠네요. 60년대 한국에 와서 통도사.범어사 스님들과도 친했고, 불교에도 밝으시던….

▶향적=인연이 좀 있어요. 89년 제가 프랑스 베네딕도 수도원 측에 그곳 생활 1년을 요청했을 때 수도원 측에서는 제가 정말로 한국 스님인지 확인하려 했을 것 아닙니까. 수도원의 의뢰로 제 은사 일타 스님을 찾아 해인사를 방문했던 분이 바로 그 신부님이죠.

▶이해인=놀랍네요. 오전 2시에 일어나 기도를 하고 묵언(默言)수도를 하는 그 엄격한 수도원인데요….

▶향적=저는 지금도 수도원 생활을 잊지 못합니다. 물론 '네 종교, 내 종교' 구분없이 저를 받아준 수도원의 너그러움 때문에 가능했지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예수님 사랑과 부처님 자비가 둘 아닌 하나라는 것을 주제로 좌담도 하게 돼 영광입니다. 시와 산문을 통해 사랑을 구현하는 해인 수녀님과 더불어서 말이죠.

▶이해인=올해로 입회 40년인데, 수도원의 배려로 본격적으로 문서 선교를 한 게 8년째랍니다. 수도원 안에 '해인 글방'을 만들고, 편지나 e-메일을 통해 대중의 마음을 위로해주는 선교이지요. 정말 유감스러운 점은 편지 내용인데 슬프고 외롭다거나 살기 싫다는 쪽이 엄청 많아요. 제 생각에는 요즘 들어 사람들은 번잡한 삶에 염증을 느끼는 동시에 순수함이나 내면의 영성(靈性)에 대한 목마름도 마음 한 편에 갖고 있어요. 그게 우리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향적=공감합니다. 연애편지 쓰는 풍속이 없어지면서 좋은 문학작품이 안 나온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시를 접할 여유는 더욱 없어지지요. 휴대전화.인터넷 보급률이 1, 2위를 다투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지만 사회적 갈등은 한층 더 늘어납니다.

▶이해인=그래요. 우리 삶에서 기쁨이란 단어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는지 몰라요. 크리스마스 때 "기쁘다, 구주 오셨네"하는 것이 전부죠.(웃음) 어떤 통계를 보니 세 사람 중 한명은 자신의 삶이 우울하다고 고백했다더군요. 그래서 저는 얼마 전 시와 산문을 담은 책을 내며 제목을 '기쁨이 열리는 창'이라고 했어요. 마음의 창에 기쁨의 종을 달아보자는 제안이지요.

▶향적=그렇다면 이 기회에 수녀님 시집 '민들레의 영토'에 담긴 시구들을 읊어볼까요? '기도는 나의 음악/가슴 한복판에 꽂아놓은/사랑은 단 하나의/성스러운 깃발…'('민들레의 영토' 중) '내 생애가 한번뿐이듯/나의 사랑은 하나입니다//당신 아닌 누구도 치유할 수 없는/내 불치의 병은 사랑'('해바라기 연가' 중)

▶이해인=정말 영광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는 76년에 나왔으니 내후년이면 발간 30주년을 맞는데, 과분하게도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향적=시는 수도자인 제게는 생생한 기도 체험입니다. 수녀님의 시가 한점 거짓 없는 목소리임을 확신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수녀님의 책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에 나오는 '당신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합니다'는 말도 세밑에 되새겨보고 싶군요.

▶이해인=어쩌면 우리 사회는 그 반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남을 용서하고, 성경 말씀대로 더 많이 마음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 수 있다면 한 해 365일이 크리스마스고, 우리 누구나가 산타클로스가 되죠.

▶향적=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세계의 으뜸을 도솔천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어원은 알고 보면 지족(知足)이랍니다. 즉 만족할 줄 안다면 이 모든 세상이 바로 천국인 셈이죠. '어린왕자' 머리글에 아름다운 글을 쓴 어느 스님이 제게 편지를 보냈어요. 이 구절이 특히 가슴에 남아있습니다. "'어린왕자'를 읽은 사람들은 형제가 돼 만난 일도 없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그럼요.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자면 사회 구성원 모두는 서로 친구일 수밖에 없지요.

▶이해인=그럼요. 지난 한 해 힘들었던 분들, 그리고 이 시각 외로운 사람 모두가 우리 친구이고요. 제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저를 "이모님"이라고 부르는 무기수 신창원 형제나 서진룸살롱 사건의 장진석.박영진 형제도 친구지요. 그래서 우리 창원이가 최근에 보낸 카드도 들고 왔어요. 보실래요.

▶향적=글씨도 여자 글씨처럼 예쁘고, 자기를 '개구쟁이 조카'라고 한 말에도 존경의 마음이 묻어납니다. 수녀님 사랑의 실천이 놀랍군요. 불교에서 자비라고 할 때 깨달은 자의 행위라는 먼 느낌이 있는데 기독교 사랑은 이토록 친숙하고 구체적입니다. 사실 자비의 참뜻은 산스크리트어로는 '마이트리(慈.진실한 우정) 카루나(悲.연민)'이거든요. 사랑과 자비란 '나의 기쁨은 너에게, 너의 슬픔은 나에게', 그런 것 아닐까요.

▶이해인=불교의 자비란 말에 그렇게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군요. 제 짧은 생각에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남에겐 관대하게 대하는 것이 자비의 첫걸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지난 한 해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아 내내 걱정이었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향적=올해 사회 갈등을 지켜보며 저는 부처님 말씀을 생각했습니다. "세상이 내게 싸움을 걸어오는 게 아니다. 외려 내가 세상과 사회를 향해 싸우려든다." 프랑스어로 된 책을 보니 철저한 고행의 수행으로 유명한 티베트의 밀라레파 스님도 이렇게 말했지요. "인생은 결코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을 체험하는 것이다." 정치인을 포함해 우리들이 문제를 자꾸만 만들어놓고 그걸 풀려고 아등바등하는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비유지요.

▶이해인=우리 종교인을 포함한 수도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은 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삶을 보아도 '교만한 의인'보다 '겸손한 죄인'을 외려 어여삐 여기셨지요. 혹시 우리가 '교만한 의인'은 아닌가를 물어봐야 합니다.

▶향적=그럴 수도 있지요. 우리 사회에는 존경받는 겸손한 의인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프랑스의 가장 존경받는 종교지도자는 피에르 신부가 아니던가요? 모든 물질적 유산을 포기한 채 수도원에 들어갔고 빈민구호에 삶을 바친 위대한 분 말이지요. 프랑스 국민은 어렵고 힘들 때 그분을 바라봅니다.

▶이해인='단순한 기쁨'으로 국내에도 꽤 알려진 분 말이죠? 그렇다면 오늘 그 피에르 신부님의 말을 기억해 보고 싶습니다. "삶이란 사랑하기 위해 주어진 얼마간의 자유시간일 뿐이다."

▶향적=기독교의 명절인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서울 조계사 앞에도 며칠 전부터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드립니다'고 쓴 대형아치를 세워놓았지요. 수녀님은 동시도 쓰신다고 들었는데 성탄에 잘 어울릴 작품 하나를 수녀님의 목소리로 한번 들어볼까요. (웃음)

▶이해인=그러면 저의 시 '별아기를 생각하며'가 어떨까요. "태어나는 순간부터/목이 마른 예수아기/사랑이 너무 많아 고독한 별 아기/그와 함께 나도 믿음의 먼 길을 갈 수 있을까?/기쁨 못지않게 그가 받아 안은 아픔의 세월//…많은 이들과 인사를 나누다가/왠지 조금은 쓸쓸해지는 성탄 밤/별 아기의 밤"

▶향적 스님.이해인 수녀=성탄을 축하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정리=조우석 기자 <wowow@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 이해인 수녀(59)는

초.중.고 교과서에 시들이 수록될 정도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시인 수녀. 올리베타노 베네딕도 수녀회 소속의 그는 1968년에 첫 서원을 했다. 종신서원을 한 76년에 펴낸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이래 9권의 시집을 펴냈다. 필리핀 성루이스대 영문학과(75년)와 서강대 대학원 종교학과(85년)를 졸업했다. 6권의 번역서에는 데레사 수녀의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와 틱낫한 스님의 '마음 속의 샘물'이 포함돼 있다.

*** 향적 스님(54)은

유럽 유학 경험을 가진 '불교신문'대표 스님. 재래식 승가교육의 틀을 벗어나 대중의 고뇌에 접근하자는 소신을 가진 그의 뜻은 이후 월간'해인'의 창간(82년)으로 표현됐고, 94년 조계종 개혁 이후 교육원 교육부장 역임에서도 표출됐다. 89년 프랑스 베네딕도 수도원 1년 체험 이후 프랑스 사브아 주립대에서 2년간 수학한 그는 67년 해인사에서 일타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82년 동국대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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