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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브라더' 홍명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1면

꾹 다문 입술에 쏘아보는 듯한 매서운 눈매. 찬 바람이 불어 접근하기 힘들 것 같은데도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격랑에 휩싸였던 한국축구대표팀은 그가 온 후 순풍을 만난 듯하다.

'돌아온 야전사령관' 홍명보(34·포항 스틸러스).

지난 21일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은 그의 카리스마를 확실하게 보여준 경기였다. 그동안 거스 히딩크 감독과의 사이에 흘렀던 미묘한 갈등도 봄눈 녹듯 사라졌다.

◇감독의 불신

그는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그가 대표팀에서 빠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히딩크 감독은 그를 8개월이나 부르지 않았다.

부상 때문이라고는 했지만 분위기를 익혀야 한다며 역시 부상 중인 박지성을 일본에서 불러왔던 것을 보면 꼭 그것만은 아니었다.

히딩크 감독은 스위퍼를 없애고 일자 수비를 사용했다. 일자 수비에서 가장 중요하게 요구되는 스피드에서 그는 후배들보다 처졌다. 더구나 히딩크 감독이 강조하는 체력에서도 기준미달이었다.

그러는 사이 송종국·유상철 등이 중앙수비수로 합격점을 받았다. 그는 한국 축구에서 더 이상 필요없는 선수가 되는 듯했다.

히딩크는 "과거에 유명하고 잘했다는 선수도 현재 일정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대표팀에서 제외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홍명보를 겨냥한 말이었다.

지난 1월 북중미 골드컵 대회를 치르고 난 뒤 한국대표팀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 1승1무5패라는 부끄러운 성적표도 그랬지만 어린 선수들은 한 번 흔들리면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경기 전체를 이끌어가는 '보이지않는 손'이 필요했다.

그리고 많은 축구 전문가는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선수는 단 한명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히딩크 감독은 3월 유럽전지훈련 명단에 홍명보를 포함시켰다. 자기 생각을 고집해왔던 히딩크 감독이 처음으로 뜻을 굽힌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홍명보는 못마땅한 선수였다.

◇소리없는 카리스마

대표팀에 재합류하자마자 체력 테스트를 받았다. 20m 왕복달리기에서 그는 중간에 낙오했다. 이를 악물었다. 오기가 생겼다. 자신을 우습게 보는 히딩크 감독을 실력으로 완전히 제압(?)하겠다고 다짐했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그리고 완전히 신인의 자세로 돌아갔다. '파워 프로그램'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지구력을 키우기 위해 별도의 개인 체력훈련까지 병행했다.

그리고 이달초 파주와 서귀포에서 실시한 테스트에서 국제 기준인 1백20회를 거뜬히 넘어버렸다. 그의 성취는 본인은 물론 후배 선수들에게도 자신감을 심어줬다. 무엇보다 그에 대한 의구심을 지우지 못했던 히딩크 감독도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었다.

레이먼드 베르하이옌 트레이너 역시 "서른이 넘은 선수가 그렇게 짧은 기간에 저 정도의 체력향상을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홍명보의 힘'은 압도하면서도 포용력을 갖는 카리스마다. 축구협회 김광명 기술위원은 "평소 거의 말이 없는 편인데도 모든 선수가 그를 따른다"면서 "경기 중에도 명보가 함께 뛰고 있다는 것만으로 어린 선수들에겐 힘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돌아온 야전사령관

히딩크호에서 그는 수비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해 왔다. 그러나 이제는 체력에 자신이 생겼고 감독에게도 믿음을 줬다. 공·수의 완급을 조절하는 그만의 플레이를 보여줄 때가 온 것이다.

잉글랜드전은 '그때'였다. 전반 중반 이후 그는 상대 공격을 끊은 뒤 센터서클 위로 올라가 설기현과 이천수 등에게 적절한 공간 패스를 내줬다. 전반 37분에는 30m짜리 대포알 같은 중거리슛을 날려 잉글랜드 골키퍼를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이 슛은 골로 연결되지는 않았지만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강팀다운 강팀을 만나 주눅이 들었던 선수들에게 '적진 앞으로'를 명령하는 야전사령관의 우렁찬 외침이었던 것이다.

김광명 위원은 "홍명보의 2선 침투는 감독의 지시가 아니라 홍선수의 판단력에 따른 것"이라면서 "히딩크 감독도 만족감을 표시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네번째 출전이자 마지막이 될 월드컵 본선. 그가 16강 교향곡을 지휘하는 모습을 팬들은 보고 싶다.

서귀포=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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