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해튼 주름잡은 파티걸, 러 스파이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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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미국에서 스파이 혐의로 기소된 안나 채프먼.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사진이다. [AP=연합뉴스]

‘붉은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팜므 파탈(치명적 매력의 요부)’ ‘본드걸 풍의 스파이’.

러시아에서 온 미녀 스파이 한 명이 미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최근 체포돼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연방법원에 선 안나 채프먼(28). 그는 대외첩보부(SVR) 스파이단 동료 10명과 함께 붙잡혔다. 하지만 뉴욕 포스트 등 미 언론의 관심은 채프먼에게 집중되고 있다. 평범한 시민으로 위장했던 다른 이들에 비해 미모와 재력을 겸비한 뉴욕 사교계 명사로 행세한 이력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 사이트인 ‘링크드인’에 올라 있는 채프먼의 프로필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경제학 석사 학위를 갖고 있고 영국 유수의 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했다고 밝혔다. 또 모국어인 러시아어 외에 3개 국어를 할 수 있다고 썼다. 영어는 능통, 독일어 일상 대화 가능, 프랑스어는 기초 수준이라고 썼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많다. 1999~2005년 모스크바에 있는 민족우호대학(RUDN)에 다녔다면서도, 2003년부터 영국 런던에서 직장 생활을 한 걸로 돼 있다. 첫 직장은 자가용 제트기 임대 회사로 유명한 넷제츠였고, 영국 3위의 은행인 바클레이에서도 1년간 일했다고 주장했다.

이후 행적도 의문투성이다. 2005~2006년 기업공개(IPO) 책임자로 일했다는 내비게이터 헤지 펀드란 회사는 인터넷 사이트조차 없다. 2006년 말 온라인 부동산 검색 회사를 차려 현재까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지만, 비슷한 기간 투자자문회사인 KIT포티스 부회장으로도 재직한 것으로 돼 있다.

뉴욕에는 올 초에 왔다. 영국인 남편과 이혼한 직후 건너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뉴욕 생활은 화려했다. 고가의 옷을 빼입고 상류층들이 찾는 레스토랑, 고급 클럽 등에 자주 드나들었다. 유력 인사들이 모이는 파티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유명 소셜네트워크사이트인 페이스북에는 백악관과 재무부 자문위원·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저명한 경제학자인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채프먼의 친구로 등록돼 있다. 루비니 교수는 채프먼과의 관계에 대해 “대규모 파티에서 한두 번 그를 본 적이 있다”고 해명했다.

채프먼이 러시아에 어떤 정보를 넘겼는지는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미 연방수사국(FBI)은 그가 러시아 유엔대표부에 드나드는 남자를 정기적으로 만나 미국 관련 정보를 넘겼다고만 밝혔다. 커피숍·서점 등에서 서로 가까이 앉은 뒤 각자의 노트북 컴퓨터로 무선 네트워크를 이용해 정보를 주고받는 방식을 사용했다. 채프먼의 정체는 6개월간 그를 감시해온 FBI의 함정수사로 발각됐다. 러시아 영사관 직원으로 위장한 FBI 요원은 그에게 접근해 “다른 러시아 스파이에게 가짜 여권을 전해달라”고 요구하자, 채프먼이 이를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김한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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