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렬된 피값 논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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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4강전
[제5보 (57~74)]
黑. 이세돌 9단 白.구리 7단

구리(古力)7단의 백△가 우상 흑의 눈을 탈취했다. 쫓기던 백이 흑의 자만심을 틈타 역습의 한칼을 성공시켰다. 이제 귀의 흑은 그대로 사망하는 것인가.

살 길은 없다. 두 집은 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흑의 입장에선 그냥 죽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피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 날카롭게 번득이는 이세돌9단의 두 눈이 마치 새끼를 잃은 살쾡이의 눈처럼 섬뜩하다.

외곽을 둘러싼 두 개의 백 대마도 완생은 아니다. 상변 쪽은 A로, 우변 쪽은 B로 파호하면 두 집이 없다. 이 중 우변 쪽 백은 수가 너무 길어 상대하기 어렵다. 남은 것은 오직 상변 쪽인데 애석하게도 이쪽도 '참고도'가 보여주듯 공략이 쉽지 않다. 백8 꼬부리고 나올 때 응수가 난처해지는 것이다.

67로 돌연 좌상귀에 뛰어든 수에서 기병(奇兵)에 능한 이세돌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상대가 전면전을 두려워해 조금 물러선다면 그걸 챙겨 계가로 갈 생각이고 반발한다면 여기서 뼈를 묻으려 한다. 일종의 타협안인데 천하의 싸움꾼인 이세돌이 타협의 손을 내밀었다는 그 자체가 흑의 어려운 상황을 웅변해 주고 있다.

구리7단은 단호하다. 70으로 끊어 응수를 보더니(축으로 잡으면 A가 사라진다) 74로 차단해 버렸다. 이것으로 협상은 깨졌다.

시체를 가운데 두고 흑이 값을 내놓으라 하자 백은 한푼도 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가만히 보면 구리는 이세돌을 충동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세돌의 강수를 유도해 그때 완전히 명맥을 끊어버림으로써 호랑이를 산중으로 놓아보내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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