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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유쾌한 도전 멈췄지만 미래는 더 밝다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국 축구대표팀은 2002년 한·일월드컵 멤버와 20대 초반의 신예들이 조화를 이뤘다. 신예들이 충분한 경험을 쌓았고, 10대 후반의 유망주들이 성장하고 있다. 비록 8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한국 축구의 미래는 밝다. 더반(남아공)=이호형 기자

세계를 향한 한국 축구의 유쾌한 도전은 7월의 문턱에서 멈추었다. 원정 16강을 넘어 8강을, 2002년의 기적을 재현하겠다는 축구대표팀의 야심은 월드컵 원년 챔피언 우루과이의 벽 앞에서 물거품이 됐다. 그러나 한국 축구의 꿈은 진행형이다. 태극전사들은 고개를 들고 자랑스럽게 남아공을 떠나도 좋다.

16강전을 앞두고 한국 축구는 8강전 상대까지 눈여겨 봐뒀다. 미국이든 가나든 해볼 만하다고 여겼다. 미국은 슬로베니아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랜던 도노번이 결승골을 터뜨리기 직전까지 탈락 위기에 빠졌던 팀이다. 상대가 가나라면 조별리그에서 나이지리아를 상대로 예방접종을 한 한국이 유리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 놀라운 투지와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을까.

한국 축구는 2000년대의 첫 10년을 화려하게 보냈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첫 승리와 16강-8강-4강 진출의 위업을 이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원정 첫 승리를 기록했다. 16강에는 진출하지 못했지만 대회 준우승팀 프랑스와 비겼고 1승1무1패로 승점 4점을 따냈다. 그리고 남아공에서는 월드컵 참가 사상 처음으로 원정 16강의 목표를 이뤘다.

지나간 10년은 한국 축구를 바꾸어 놓았다. 아시아에서 골목 대장 노릇을 하던 호랑이는 이제 막 세계 축구의 높은 벽을 넘었다. 한번 넘은 벽은 더 이상 벽이 아니다. 벽을 넘는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줄기찬 도움닫기의 결과다. 7회 연속 본선 진출의 의미가 여기 있다. 한국의 축구팬들이 월드컵 본선 진출을 당연한 일로 여기듯 조별리그 통과를 당연하게 여길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21세기 첫 10년 동안 눈부신 발전
2002년의 성과를 두고 축구 전문가들은 ‘홈 어드밴티지를 업고 이뤄낸 일회적 사건’이라는 데 대체로 공감했다. 하지만 이젠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한국은 2006년 독일 월드컵이 끝난 뒤 국제축구연맹(FIFA)이 산출한 성적표에서 32개국 중 17위에 올랐다. 16강에서 딱 한 계단 부족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국내파 감독을 기용해 조별리그를 돌파했다. 최근 열린 세 번의 대회에서 두 번이나 16강에 올라갔다.

이번 대표팀의 특징은 ‘크로스오버(crossover)’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크로스오버란 이질적인 두 요소가 합쳐져 새로운 효과를 낸다는 뜻이다. 남아공 월드컵팀은 2002년 월드컵 세대와 ‘젊은 피’가 크로스오버돼 좋은 하모니를 이루었다. 신구의 조화라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다.

월드컵 팀 선수 23명 가운데 골키퍼 이운재, 수비수 이영표·차두리, 미드필더 박지성·김남일, 공격수 안정환 등 6명은 2002년 월드컵을 경험했다. 반면 기성용·이청용·이승렬·김보경 등은 갓 스물을 넘긴 월드컵 새내기들이다. 2010년 남아공에서 한국 축구는 성실하고 우직하면서도 발랄했다. 선수들은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지만, 강팀과의 대결이라고 해서 주눅이 들지는 않았다.

이운재는 정성룡에게 자연스럽게 자리를 넘기고 선배로서 돕고 있다. 주로 후반에 교체선수로 기용되는 김남일은 경기나 훈련 전후로 기성용과 김정우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귀를 열고 선후배의 의견에 귀를 기울인 독특한 리더십의 주장 박지성은 성공적인 세대 교체를 이루는 데 중요한 연결 고리 역할을 했다.

어린 나이에 월드컵이라는 큰 무대를 경험한 신세대 4인방은 다음 대회 때는 팀의 중진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원활한 세대 교체는 미래를 위한 저축인 셈이다. 기성용·이청용이 월드컵 무대를 누비는 모습을 지켜본 또래의 축구 선수와 후배들에게는 ‘나도 하고 싶다’는 경쟁심과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을 것이다.

한국은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본선 진출의 물꼬를 다시 튼 이후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1986년 이후 태어난 선수들은 지금껏 한국이 출전하지 못한 월드컵을 본 적이 없다. 월드컵은 한국이 줄곧 나가는 대회일 뿐이다. 월드컵에 대한 경외심이나 두려움이 없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16강도 마찬가지다. 앞으로는 훨씬 더 가벼운 마음으로 자신감을 가지고 16강에 도전장을 던질 것이다. 앞으로 다가올 10년간 한국 축구는 더 눈부신 위업을 이룰 수 있다.

다음 동작 생각하는 창조적 축구 익혀
지난해 맨체스터를 방문해 박지성을 인터뷰했다. 여러 질문 가운데 ‘가장 무서웠던 지도자는 누구였는가’라는 질문도 있었다. 박지성의 대답은 “초등학교 때 감독님”이었다. 이유를 묻자 “많이 맞아서”라고 설명했다.

박지성은 스승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그대로 믿는 소박하고 성실한 성격이다. 그런 박지성도 그 시절, 그 시스템 속에서는 얼마간 맞으면서 축구를 배웠다. 축구 선수 대부분이 박지성과 같은 경험을 했다. 그 윗세대는 더 했다. 그리고 지금도 ‘많이’ 좋아지기는 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초등학교 감독님’은 박지성의 마음속에 축구를 가르쳐준 고마운 스승인 동시에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만일 박지성이 어린 시절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 축구를 배웠다면 지금과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혹시 좀 더 창의적이고 발랄한 축구를 구사하지는 않았을까. 그 해답을 보여주는 선수가 바로 대한민국의 젊은 피들이다.

기성용과 이청용은 기존 한국 축구와 다른 문법으로 공을 찬다. 기성용은 공을 받은 후 움직임이 한 박자 빠르고 부드럽다. 민첩성이 유별나서가 아니다. 다음 동작을 먼저 생각하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을 차는 게 쉽고 편하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생각하면서 스스로 상황을 타개해 나간다.

개인기 부족은 한국 축구의 약점으로 꼽힌다. 유럽과 남미는 물론 중동 선수와 경쟁해도 뒤진다. 어려서부터 이기는 축구만 추구하다 보니 개인기를 부리면 감독에게 혼쭐나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청용은 예외다. 이청용이 스피드와 날렵한 발놀림으로 상대 수비를 따돌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이청용은 프리미어리그에서도 40m가 넘는 폭발적인 드리블로 상대 문전을 파고들어 놀라움을 샀다. 이승렬과 김보경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더 이상 상대 선수보다 개인기에서 뒤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이 선배들과는 다른 축구를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기성용은 중학교 1학년부터 4년 반 동안 호주에서 유학하며 공을 찼다. 정규 수업을 모두 듣고 방과 후에 축구를 즐겼다. 기성용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매일같이 죽어라 훈련하는데 나는 이렇게 조금만 공을 차도 좋을까 걱정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공을 더 차고 싶었다”고 회상했다. 기성용의 아버지 기영옥씨는 금호고에서 고종수, 윤정환 등 뛰어난 미드필더를 길러낸 지도자다. 그런 지도자가 자신의 아들을 축구와 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곳으로 축구 유학을 보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이청용은 일찌감치 프로행을 택했다. 도봉중 3학년 때 FC서울에 입단했다. 병역 면제라는 혜택을 받았지만 학벌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학업 포기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가끔 남들처럼 고등학교·대학교에 진학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후회하고 걱정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오히려 축구가 아니면 할 게 없다는 생각 때문에 더 열심히 한다”고 말했다.

프로 선수가 된 이청용은 흙먼지가 일고 자갈이 섞여 있는 학교 운동장이 아니라 융단 같은 초록 잔디 위에서 훈련하며 기량을 키웠다. 고교에 진학했다면 우승을 하기 위해 먼 장래에 도움이 될 개인기 연마 등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구단 FC서울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3~4년 후에 완성될 선수 이청용을 가꿔왔다.

이승렬과 김보경은 용인축구센터 출신이다. 학원 축구의 틀에서 벗어나 유럽 방식으로 유소년을 지도하겠다고 나선 축구 학교다. 지난 2001년 허정무 감독은 히딩크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건네고 이곳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승렬과 김보경은 그때 제자들이다. 허 감독도 그때 뿌린 씨앗들이 자라고 자라 자신이 지휘하는 대표팀에서 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승렬과 김보경 또래 중에는 이들을 능가할 만한 선수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승렬은 지난해 이집트에서 열린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 월드컵에서는 벤치에서 경기를 구경하는 설움을 겪기도 했다. 네덜란드 명문구단 아약스에서 활약하는 석현준(19) 등 축구팬들에게 이름이 익숙하지 않은 재목들이 곳곳에서 커 나가고 있다.

박지성, 한국 축구의 도전과 성취 상징
박지성은 21세기에 열린 세 차례 월드컵에 모두 출전했다. 그리고 매 대회 골을 터트렸다. 2002년 한·일 대회에서는 포르투갈과 조별리그 최종전에 결승골을 넣었다. 2006년 독일 대회 때는 프랑스와의 2차전에서 천금 같은 동점골을 만들어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그리스와의 첫 경기에서 쐐기골을 넣었다. 2002년에는 팀의 막내였다. 2006년에는 팀의 중진이었고, 이번 대회에서는 주장 완장을 찼다.

박지성은 99년 허정무 감독에 의해 올림픽 대표팀에 발탁되며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박지성은 2000년 무대를 일본으로 옮겨 J-리그에서 프로에 데뷔했다. 2002년 월드컵 이후에는 히딩크를 따라 네덜란드로 갔다. 그리고 2005년에는 마침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성했다.

박지성의 강점은 한국 축구의 강점과 매우 흡사하다. 그는 남들보다 많이 뛴다. 꾀를 부릴 줄 모른다. 나보다는 팀 전체를 먼저 생각한다. 체격은 작지만 먼저, 재빨리 움직여 약점을 극복한다. 그리고 매일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변신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런 박지성의 강점은 한국인 전체의 일반적인 장점과도 흡사하다.

박지성은 이런 장점을 바탕으로 일본에서도, 네덜란드에서도, 축구 종가 잉글랜드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이 같은 박지성의 성장사는 곧 한국 축구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박지성의 뒤를 따라 이영표, 설기현, 김두현, 이동국, 조원희 등이 잉글랜드 무대에 발을 내디뎠다. 박지성이 가는 길을 따라 한국 축구도 아시아의 수준을 넘어 세계 수준으로 발돋움했다.

‘메이드 인 코리아’가 싸구려의 대명사였던 건 20년 전 이야기다. 이제 ‘메이드 인 코리아’는 믿을 만한 상품의 대명사다. 박지성이, 한국 축구가 이번 월드컵을 통해 그걸 증명했다. 물론 세상이 또 어떤 방향으로 변할 지는 알 수 없다. 혹시 또 아는가. 10년 후에는 ‘메이드인 차이나’가 세계 축구를 호령하고 있을지. 이곳엔 영원한 강자도, 영원한 약자도 없다. 한국 축구도 쉬지 않고 달려야 산다.

포트 엘리자베스=이해준 기자 hjlee7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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