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펜 도운꼴" TV 범죄보도 자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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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프랑스 언론에서 범죄가 사라졌다. 대통령 선거에서 극우파 장 마리 르펜 국민전선(FN)당수의 돌풍을 만들어낸 주역인 범죄가 선거가 끝나자 자취를 감췄다. 적어도 TV 뉴스에서는 그렇다.

대선 1차투표 전만 해도 프랑스 TV의 저녁뉴스는 으레 폭력과 강·절도 등 범죄 소식으로 시작됐다. 방송사 간에 경쟁이라도 벌이듯 불타는 자동차나 깨진 은행 유리창 등의 모습이 브라운관을 메웠다. 하지만 요즘은 TV 뉴스에서 그런 장면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같은 현상은 통계수치로도 드러난다. 일간지 리베라시옹에 따르면 1차투표 전 20일 동안 TF1과 프랑스2, 프랑스3 등 3대 방송의 범죄관련 보도건수는 모두 2백5차례였다. 하지만 1차투표 후 20일 동안의 범죄 보도는 1백8건으로 줄었다.

범죄 소탕을 호언한 르펜의 기세에 놀라 프랑스의 범법자들이 꼬리를 내린 걸까. 물론 그건 아니다. 프랑스의 범죄율은 대선 전후로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여과되지 않거나 과장된 범죄 보도가 르펜 돌풍에 일조했다"는 호된 비판을 받은 프랑스 TV들이 자제하고 있는 것이다.

보도건수만 준 게 아니라 내용도 달라졌다. 섬뜩한 범죄현장 대신 정부의 대책이나 마을 주민들의 방범활동 등이 주류를 이룬다.

이처럼 프랑스 TV들은 최근 르펜 충격에 반성하는 태도가 역력하다. 지난달 30일 열린 국영방송 프랑스2의 보도국 총회에서는 "뉴스가 지나치게 사회불안을 조성했다"는 자체 비판이 쏟아졌다. 프랑스3도 이번주 중 자신들의 보도태도를 돌아보는 총회를 소집할 예정이다.

다만 프랑스 최대 방송사로 "선정적인 범죄보도에 앞장선다"는 비판을 받았던 민영 TF1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현실을 보도했을 뿐"이라는 태도다. 하지만 구성원들의 생각은 다르다. 한 사회부 기자는 "우리는 무뇌아처럼 아무 비판의식도 없이 상부의 지시에 따랐다"고 자탄했다.

미디어 민주주의 시대에도 미디어에 의한 여론 오도는 가능하다. 르펜 돌풍에서 보듯 자칫하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프랑스 TV들이 사회의 올바른 거울로 거듭나 프랑스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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