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탁상품 손실 보전 '制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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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은행과 증권사들이 파는 신탁상품은 운용실적에 따라 이익을 배당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심하면 원금을 까먹을 수도 있으며, 이 경우 투자자가 손실을 떠안아야 한다. 확정 금리를 보장하는 은행 예금과 다른 것이다. 그러나 금융기관들이 투자자들의 손실을 보전해주는 사례가 종종 있었다. 이런 관행에 금융당국이 제동을 걸었다.

금융감독위원회는 10일 외환은행이 신탁상품 고객의 손실을 보전해주기 위해 이들에게 높은 금리로 정기예금을 들 수 있게 한 것은 신탁업 감독규정에 위배된다고 해석하고 이를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올들어 상당수 투신·증권사들이 이미 신탁상품 고객의 손실을 보전해준 것으로 드러나 외환은행에 대한 조치가 형평성을 잃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특히 일부 고객은 증권사 등에 손실을 보전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해 물의를 빚고 있다. '투자자 손실 부담' 원칙이 헝클어지면서 '도덕적 해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진 외환은행=외환은행은 3개 신탁상품의 자금 중 6백12억원어치를 하이닉스 채권으로 운용했다. 그러다가 올해초 하이닉스 상황이 악화되면서 이 채권의 대손충당금(손실에 대비해 미리 쌓아놓는 돈)을 채권의 50%인 3백6억원으로 높였다.

그만큼 해당 신탁의 수익률이 떨어지게 되면서 투자자 항의가 빗발치자 외환은행은 지난달 25일부터 이들이 신탁예금을 해지하고 정기예금에 가입하면 연 9.2%의 우대금리를 적용하기 시작했다. 일반 정기예금 금리는 연 5.2% 수준이다.

하이닉스 충당금 등으로 발생한 고객 손실분 약 3백20억원을 우대금리로 보상해주려 한 것이다. 은행의 공신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에서다.

금감위는 이에 대해 '손실부담 원칙에 어긋난다'며 제동을 걸었다.

외환은행의 해당 신탁계좌 수는 8만5천90개로 8천26억원이다. 이중 1만1천여 계좌 3천3백억원어치가 이미 정기예금으로 전환됐다고 은행 측은 설명했다. 문제는 이미 정기예금으로 바꾼 사람에 대한 대우다.

금감원 정성순 은행감독국장은 "우대금리 적용 자체가 규정위반이므로 기존 전환분에 대해서도 9.2%의 이자를 지급하는 순간 제재가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외환은행으로선 이미 정기예금으로 전환한 사람에게 우대금리를 주지 않을 경우 소송에 휘말릴 수 있고,그렇다고 우대금리를 주자니 금감원의 제재를 받게 될 난감한 처지에 놓였다.

외환은행은 금감원의 공식 입장이 전달되면 은행 방침을 정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직 정기예금으로 전환하지 못한 신탁 가입자에 대해서는 금감위 결정에 따라 우대금리 정기예금을 팔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이들의 항의도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하이닉스 채권이 포함된 신탁상품을 갖고 있는 산업·부산은행, 수협 등 다른 금융기관의 해당 고객까지 합하면 14만9천여명이 이와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다.

◇증권사들도 손실보전=증권사들의 펀드 상품은 대부분 은행권의 신탁예금과 성격이 비슷하다. 그런데도 증권사들은 사실상 손실분을 보전해주는 사례가 많다.

대한투자신탁증권은 지난 3~4월 만기가 닥친 8천2백억원의 투기채펀드 중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하이닉스·현대건설 채권 6백88억원어치를 떠안았다. 해당 금액을 자신의 손실로 처리하고 예금주인 새마을금고에 고스란히 내준 것이다. 다른 펀드에 들어 있는 돈을 모두 빼내겠다는 새마을금고의 주장에 굴복한 셈이다.

대투운용 관계자는 "유동성 문제가 생길 수 있어 금고측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한국투자신탁증권도 지난 3월 만기였던 5천5백억원의 투기채펀드 중 2백20억원어치가 현금으로 바꿀 수 없는 부실채권이었는데, 이중 62억원을 보전해줬다. 한투측이 받아야 할 수수료(신탁보수)를 깎는 방식으로 손실 일부를 보전해준 것이다.

한투측이 1999년에 대우그룹 채권이 편입됐던 펀드를 연장할 당시 원리금 보장을 약속했던 만큼 이를 지키라는 게 예금주인 새마을금고측의 주장이었다.

한투와 대투는 각각 3조원과 2조8천억원의 공적 자금이 투입된 곳이기 때문에 '국민의 돈으로 투자자의 손실을 보전해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은 이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다른 상당수 증권사도 지난 3월 만기가 된 투기채 펀드 중 손실금액 일부를 보전해줬다.

정선구·김현기·최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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