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아찾기에 삶 바친'각설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3면

'으싸 얼씨구 아싸'

11년 전 월미도에서

손님 끌려고

각설이 타령에 맞춰

정신없이 춤을 추다가

문득 슬픈 표정의

사람들을 보았다.

실종된 개구리 소년의 부모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애간장을 쓸어내리며

금지옥엽, 사랑하는 아이들을찾아 헤매는 막막함을

어찌할까.

나라도 힘이 돼 주어야지.

2백여명의

엄마·아빠들을 만나

19명의 아이들을

찾아줬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어.

사랑은 잃어버리면 안돼.

잃어버린 사랑은

다시 찾아야 돼.

따가운 햇살과 분주한 발걸음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서울 청량리역 광장. 지난 3일 이곳은 춘천으로, 대성리로, 청평으로 제각기 귀향지를 향하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간판이 유난히 요란한 청량리 롯데백화점 건너편 인도. 여름 옷가지를 길가에 펼쳐놓은 한 노점상이 바쁘게 지나치는 이들의 시선을 다잡는다. 여느 노점상과 달리 펼쳐놓은 매물(賣物)보다 노점벽을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피켓과 전단지 때문이다.

'애타게 찾고 있어요. 자폐아입니다' '꿈속에서도 보고 싶은 성길아! 어디 있니?'

제목 한 줄만 읽어도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의 애타는 심정이 가슴을 때리는 글을 벽에 붙여 놓고 시민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나주봉(48·서울 동대문구 제기1동)씨.

'청량리 털보 각설이'로 불리는 나씨. 11년 전부터 우스꽝스러운 각설이 분장을 한 채 미아찾기 운동을 해 얻은 별명이다. 하지만 지금은 수염을 깎아 얼굴이 말끔해졌다. 그는 이젠 이름이 어느 정도 알려진 만큼 '튀는 외모'만 내세워 미아 찾기운동을 벌이기보다 정부에 대책을 요구하는 등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을 할 계획이다.

그가 미아 찾기에 나선 사연은 이렇다. 1991년 7월 월미도에서 '길거리 테이프'를 팔기 위해 각설이 타령에 맞춰 춤을 추던 그는 안타깝고 애처로운 광경을 보게 됐다. 그해 3월 실종된 대구 개구리 소년의 부모가 눈물을 글썽이며 지나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내밀고 있었던 것이다.

"졸지에 아이들을 잃고, 생사도 모른 채 길거리로 나선 부모들의 막막함이 제 가슴을 퍽하고 치더라고요. 문득 저라도 도와야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단순한 동기지만 워낙 큰 충격으로 다가왔기에 그는 실종 어린이들을 찾는 데 모든 것을 걸기로 마음먹었다. 자비로 전단 2만장을 만들어 개구리 소년 찾기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 2백여명을 만나 그들의 자녀 찾기를 도왔다. 그 중 어린이 열아홉명을 찾아 집으로 돌려보냈다.

이러다 보니 길거리 테이프는 물론 군밤장수·옷장수를 해 번 돈은 대부분 전단지와 피켓을 만드는 데 들어갔고 장사를 위해 마련한 트럭은 미아 찾기 전용차가 됐다. 이런 그에게 주위에선 '정신 나갔다'고도 했지만 실종 어린이 부모들에겐 '구원의 천사'였다. 가끔씩 힘들어질 때도 있지만 93년 13일 동안 미행한 끝에 앵벌이 조직에 잡혀 있던 김호준(당시 9세)군을 부모에게 데려다 준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아이를 원주에 데리고 가니 그 부모의 표정이란….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고맙다'는 인사를 수백번 되풀이하며 저녁엔 콩나물과 두부만으로 대여섯가지의 반찬을 만들어 밥상을 차려 주셨지요. 넉넉지 못한 살림에서 나온 진수성찬을 보고 눈물을 흘렸지요."

그는 강원도 홍천군에서 가난한 화전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을 중퇴했다.

열일곱 나이에 홀로 상경, 중국집을 전전하며 열심히 돈을 모았다. 시골 아버님과 두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80년 폐결핵 판정을 받았다.

3년간의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폐결핵이 완치되자 이번에는 부인이 집을 나갔다. 그의 첫 부인은 습관적으로 가출했고 그 때마다 그는 전국을 떠돌며 찾아다녀야 했다. 결국 4년 만에 이혼을 결심하고 머리를 삭발했다. 모든 것을 잊으려고 미국으로 이민을 갈 작정이었다. 그는 영어 학원을 다니다 지금의 부인 김선년(36)씨를 만났다.

꼼꼼하고 자상한 金씨의 도움으로 그는 새 인생을 시작했다. 아들 순철(14)군이 태어났고 그의 가정은 남부럽지 않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미아 찾기가 항상 보람만 안겨준 것은 아니었다. 92년 이형호(당시 9세)군 유괴 사건 때 범인의 협박 전화 목소리를 담은 테이프 5만개를 손수 제작해 시민들에게 무료로 나눠줬으나, 그는 결국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다. 94년 성남에서 한 가출 소녀를 타일러 집에 데려가자 아버지에게서 "며칠 있으면 또 나갈 애를 왜 데려왔느냐"며 핀잔을 받기도 했다.

"힘들 때마다 가족들의 지지가 큰 힘이 됐지요. 제가 선택한 길을 따라와 준 아내, 코흘리개 시절부터 사람들에게 전단 나눠주는 일을 했던 아들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는 지난해 동대문구청의 추천으로 제13회 서울시민대상 장려상을 받았다. 상금으로 받은 3백만원으로 지난 주엔 노점 옆에 컨테이너형 사무실을 마련했다. 미아 부모들로 이뤄진 '전국 실종 어린이 찾아주기 시민 모임' 본부인 셈이다.

"요즘 아들에게서 컴퓨터를 배우고 있습니다."

사무실에 컴퓨터를 설치하고 자원 봉사자를 모집해 미아 관련 정보 사이트를 만들어 관리하고 싶어서란다.

눈을 반짝거리며 새로운 '구상'을 밝히던 그가 시계를 보더니 급히 나갈 채비를 했다.

그날은 한달에 한번 제기동 일대에서 혼자 사는 노인들을 모시고 찜질방에 가는 날이었다.

재작년부터 딱한 처지의 노인들에게도 관심을 갖고 정기적으로 그들을 방문해 왔다. 잰 걸음으로 거리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청량리 털보 각설이'의 뒷모습엔 사랑과 꿈이 어려 있었다.

신은진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